작성일 : 10-07-19 10:58
[사찰문화실] 67) 비의 양식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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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비 이전의 비는 광개토왕비나 진흥왕 순수비에서 보듯이 개석이나 받침석이 따로 없는 자연석비가 대부분이다. 그러다가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서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이수, 비신, 귀부 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중국과는 달리 이수의 용이 두 마리가 아닌 세마리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귀부의 모습은 대부분 눈이 크고 힘찬 직립형이며 귀갑의 선은 굵은 겹선이다. 그러나, 통일신라말에는 귀부의 목이 짧아지고 귀갑은 홑선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고려에 들어오면서 귀부는 용두화되었고, 10세기 후반부터 입가에 아가미가 달린 어룡(魚龍) 귀부 형태로 바뀌어지면서 잉어처럼 수염이 나타난다. 이후 점차 규모가 작아진 석비는 14세기 경에 이르러 귀부와 이수 대신 지붕모양(우진각)의 옥개석 모양의 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려말에 와서는 신륵사 나옹선사비의 경우처럼 연화부늬를 장식한 옥개석과 장방형 받침이 나타나며, 비신 좌우에 장방형 기둥을 받친 형태가 선을 보이고 있다.
한편으로는 비몸머리의 양쪽의 모서리를 잘라낸 귀접 양식의 비도 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조선시대에는 숭유배불정책의 영향으로 승려들의 탑비보다 왕실의 능묘비나 권문사족들의 신도비 등이 많이 세워졌다.
승려들의 탑비의 경우는 이수 귀부가 많이 변형되어, 귀부의 경우는 용도 거북도 아닌 괴물꼴이 많이 생겼다. 그나마 탑비의 경우 16세기 후 크게 쇠퇴하고, 단순화된 양식의 비가 ㅁ낳이 양산되었는데, 이 경우의 비가 이수나 개석도 없이 비몸머리(꼭대기)를 둥글게 처리한 하현형(下弦形) 갈(碣)이 두드러진다. 이런 비들은 대개 능묘비, 신도비, 송덕비, 효자비들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석비의 숫자는 많이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