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으로 나누어진다. 초기에는 탑신과 옥개석이 별석으로 출발하였으나, 나중에는 탑의 규모에 따라 한개의 돌로 된 예도 보인다. 탑신에는 시대 구분없이 대개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는데, 고려에 들어와서는 이것 마저도 없는 경우가 많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 탑에는 탑신받침이 나타난다. 보원사지 석탑의 경우는 초층탑신에만 있으나, 그 후대에는 거의 모든 탑신에 받침이 나타나고 있다. 그 후 탑신받침은 점차 커지게 되어서 강릉 신복사지 석탑이나 양양 낙산사 석탑, 남원 만복사지 석탑 등에서는 탑신의 일부를 이루게 되었다.
탑은 사리를 봉안하는 장엄물이며, 이 사리들은 대개 탑의 탑신부에 봉안된다. 탑은 사리를 보관하는 장엄물이다. 따라서 사리는 목탑, 전탑, 석탑 등에서 두루 발견된다. 석탑의 경우, 탑신에는 사리를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를 사리공이라고 한다. 사리공은 탑의 중심부에 위치하는데, 목탑인 법주사 팔상전의 경우는 심초석(芯礎石)에, 분황사 모전석탑에서는 2층탑신에, 감은사지 석탑에서는 3층 탑신에, 동화사 비로암 석탑에서는 초층탑신에,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는 1층 옥개석 중안 상면에, 송림사 전탑에서는 복발부에 위치하는 등 다양하다. 그러나, 1층과 3층 탑신 상단에 위치해 있는 예가 가장 흔하다.
탑신부에 불상이 조각되는 예는 신라말기에 시작되는데, 양양 진전사지 석탑에서 보듯이 사방불로서 흔히 초층 탑신 4면에 조각되었다. 흔치는 않지만, 금릉 수도암 삼층석탑처럼 탑신에 감실을 마련하고 불상을 조각한 예도 있다. 고려시대로 내려가면 원각사나 경천사의 석탑에서처럼 여러 층에 걸쳐 12회상도까지 섬세하게 조각되는 예도 있다. 석탑에 연꽃을 조각한 예는 철원 도피안사삼층석탑, 예천 동본동 석탑의 예가 있기는 하나, 매우 희소하다. 이것은 탑안에 봉안된 불사리를 부처님으로 여기고 새긴 것이다. 가끔은 사천왕상이 초층탑신 4면에 조각되는 예도 있다. 탑신에 인왕상이 조각된 예는 경주 장항리 석탑의 예가 최초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탑신에는 문비(자물쇠와 문고리)가 조각되기도 한다. 이것은 불전(佛殿) 성격이 강했던 목탑의 출입문 양식의 잔재들로서, 전탑이나 모전석탑에서는 출입문의 역할보다 불상을 봉안하는 감실로서의 역할이 더 강했다. 초기탑의 감실에는 별도의 출입문을 장치하였는데, 현재 감실에 석문이 남아있는 것으로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정읍 은선사지 백제계 석탑, 경북 의성의 빙산사지 석탑, 안강 정혜사지 석탑 등이며, 이 밖에도 많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탑의 규모가 줄어들면서 석탑에는 감실을 대신하여 문비(門扉)를 조각한다. 문비의 양식은 경주 고선사지 석탑이 최초의 것으로 초층 탑신 4면에 문비가 조각되어 있다. 그러나, 출입문이나 불상 봉안처로서의 역할이 아닌 오로지 장식용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런 문비는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탑에까지 나타난다.
옥개석은 탑신을 덮는 지붕돌로서, 백제의 것은 크고 얇으며 경사도 비교적 낮다. 이에 비해 신라의 것은 두껍고 또한 전탑의 영향으로 옥개석 받침의 층수도 많으며, 경사도가 높다. 옥개석에 목조건축물의 부재인 포작과 난간이 장식된 예도 있는데, 지리산 백장암 석탑이 그 한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