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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7-03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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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공부방] 불교 기초 교리<제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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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9,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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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시작하면서
어떤 사람이 도자기를 만들려고 한다고 하여보자. 이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로 하는 지식은 무엇일까. 도자기를 만들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의 사용법일까. 아니면 도자기를 만드는 기본적인 원리일까.
도구의 사용법을 모른다 하여도 도자기를 만드는 원리를 안다면 도구야 자신이 편리한대로 사용하여 도자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구의 사용법만을 알고 도자기를 만드는 법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도구 또한 유효 적절하게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구의 사용법보다 도자기를 만드는 기본적인 원리를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불교를 공부함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불교용어나 불교철학 등은 부처님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기초부터 공부하려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들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어려운 불교용어나 불교철학이 아니라 부처님의 마음인 것이다.
도자기공이 도자기를 만드는 그 원리를 터득하고서야 도구를 잘 사용할 수 있듯이 부처님의 마음을 알고 나면 불교용어나 불교철학도 쉽게 이해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싯다르타 태자를 깨달음으로 인도하여 준 대자대비의 마음이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하면 의아해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싯다르타 태자가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님이 되신 것은 싯다르타 태자의 처절한 수행정진의 결과이고 그렇게 부처님이 되신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이 불교인데 그러한 석가모니부처님을 깨달음으로 인도하신 부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싯다르타 태자가 깨달음을 얻어서 석가모니부처님이 되신 것이 오로지 그 분이 열심히 수행정진하신 결과인 것일까.
우리 앞에 유리컵이 있다고 가정하여 보자. 그 컵을 필자가 집어 던져서 깨뜨렸다고 가정하여 보자. 그러면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필자가 유리컵을 깨뜨렸다고. 하지만 과연 필자가 유리컵을 깬 것일까. 만약 그 컵이 유리가 아니라 쇠로 되어 있었다고 가정하여 보자. 아니, 깨어질 수 없는 성분으로 된 컵이라고 가정하여 보자. 그러면 필자가 아무리 집어 던졌다 하더라고 그 컵은 깨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컵이 깨어졌다는 것은 컵 그 자체가 깨어질 수 있는 성분을 가지고 있었고 그 성분은 깨어질 수 있는 연을 만났기에 깨어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여 본다면 필자가 유리컵을 깬 행위도 그 행위의 표면에 나타난 모습만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필자가 컵을 깼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내면에 있는 깊은 모습을 관찰하여 이야기한다면 유리컵은 그 연이 닿으면 그 누구에게나 깨질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가 필자와 그 연이 닿아 깨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싯다르타 태자가 깨달으신 깨달음이 본래 깨달아 질 수 없는 것이라면 싯다르타 태자가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깨달아져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깨달음이 싯다르타 태자에 의하여 깨달아졌다고 하는 것은, 깨달음, 그 자체가 깨달아 질 수 있는 연을 만나면 언제든지 깨달아 질 수 있는 성질을 가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싯다르타 태자가 깨우치신 진리의 모습도 또한 누구에게나 그 연이 닿으면 깨닫게 할 성질을 가지고 있다가 싯다르타 태자라는 연을 만나서 깨달아 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 할적에 싯다르타 태자가 진리를 깨닫고 부처님이 되신 것이 아니라 진리가 싯다르타 태자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 연이 싯다르타 태자를 만나 싯다르타 태자로 하여금 석가모니부처님이 되게 하였고 그리고 그 작용은 지금도 모든 이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하여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마음이란 싯다르타 태자를 깨달음으로 인도하신 진리(부처님)의 대자대비이고, 그리고 그 대자대비는 지금도 모든 중생들에게 똑같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석가모니부처님은 이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마음을 보다 쉽게 전달하시고자 그 당시에 있던 인도철학과 그 철학용어들을 도구로서 사용하셨던 것이다.
지금도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부처님의 마음, 이러한 부처님의 마음은 세살박이 어린이부터 저명한 불교학자까지도 모두가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실천할 수가 있다. 그러기에 불교란 어렵기로 하면 한없이 어렵고 쉽기로 하면 한없이 쉬운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일자 무식장이도 부처님의 마음을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불교철학에 능통한 불교학 박사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마음을 모른다면 이해할 수가 없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불교의 용어나 기초적인 지식이 있어야만 한다는 혹자들의 말은 참으로 언어도단인 것이다.
불교는 소련의 과학자들이 우주에 우주선을 띄우는데 불경을 참고하였다는 말이 있듯이 과학을 탐구하는 수단으로 접한다면 얼마던지 과학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문학가가 문학을 탐구하고자 하여 경전을 읽는다면 불교의 경전은 얼마던지 고대인도의 문학작품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또 경제학자가 불경 속에서 경제의 새로운 논리를 탐구하고자 한다면 불교는 얼마든지 거기에도 답해 줄 수 있다.
이렇게 불교를 과학으로 문학으로 경제학으로서 배운다고 한다면 불교는 얼마든지 과학이 될 수도 있고 문학이 될 수도 있고 경제학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과학이고 문학이고 경제학이라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석가모니부처님은 과학자로서 문학가로서 경제학자로서 경전들을 설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중생들을 고통에서 건지고자 하시는 일념으로 경전을 설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과학으로서 문학으로서 경제학으로서 공부한다면 그것은 과학이고 경제학이고 문학이지 불교는 아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자세로 불교를 공부한들 이들이 불교를 바르게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불교를 과학으로서 문학으로서 경제학으로서 연구하려고 하는 이가 있다면 이들에게 있어서 먼저 필요한 지식은 부처님의 마음이 아니라 불교의 용어나 불교의 심오한 철학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용어나 철학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 그 자체를 문제삼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불교를 접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부처님의 마음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용어나 불교철학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불교에 대한 기본 용어나 기초지식은 불교를 이해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마음을 모르고 그 용어들이나 기초 지식들만을 알적에는 그러한 지식들이 부처님의 마음을 느끼려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해한 언어의 정의 내에서만 부처님의 마음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기초가 될 수 있는 불교입문서란 불교의 용어나 기초교리 등을 알기 쉽게 풀이 해 놓은 글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로지 부처님의 마음을 알기 쉽게 풀어놓은 글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시중에 나돌고 있는 불교입문서들은 부처님의 마음을 알기 쉽게 전달하는 책이 아니라 불교의 용어나 그 철학을 쉽게 풀이하기에 급급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부처님의 마음을 알기 쉽게 풀이하여 진짜 불교의 입문서가 될 수 있는 입문서를 써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이 한 권의 불교 입문서를 쓰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 입문서는 불교의 용어나 불교의 기초지식을 풀이 해 놓은 여느 일반 입문서와는 그 종류를 달리 하고 있다.
만약 독자들이 이 글을 통하여 부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바르게 느낄 수 있다면 이 글은 불교입문서로써의 그 역할을 아주 훌륭히 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출처 http://www.obong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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