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통일신라 때는 경주 남산이 석불전시장인 양 지천에 석불을 조각하였고, 특히 8세기 를전후해서 석불제작량과 규모 및 그 기법에 있어서 극치를 이루었다. 특히 철불의 경우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시기적으로 빠르다.
이 시대의 최대 걸작은 역시 토함산의 석굴암 석불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정치,사회적으로 안정되었고, 따라서 국책사업으로 석불 등을 제작했다. 석굴암 석불은 인도나 중국처럼 자연암벽을 뚫어 조성한 것이 아닌, 자연석을 다듬어 인공으로 축조한 뒤, 전후좌우 사방팔방에 여러가지 부조와 원각불을 설치했다. 이러한 석조 기술은 인도나 중국 못지 않다. 석굴암 창건이 미타정토의 희원에 있었던 만큼 이 석불의 우수성 역시 현실에 정토세계를 펼치려 했던 신라인들의 자신감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특징으로는, 입상에서는 여원인과 시무외인의 통인이 많고, 감산사 아미타불입상이나 경주구황리금제여래좌상에서 보듯이 법의는 통견에 옷주름이 가슴 앞으로 여러 겹의 U자형의 곡선을 형성하면서 늘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통일신라 전기에는 금동불이 양산되었으나, 후기에 와서는 철불상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통일신라불상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로는, 석굴암 본존불의 전형(典形)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다양성이 부족하고, 광배나 대좌에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을 하고 있으나 반면 힘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통일신라 말기에 와서는 국정의 문란, 풍수지리설의 도래, 선(禪)의 유행 등으로 불상에도 다소 흐트러짐이 보인다.
이 시대의 보살상의 특징으로는 앞시대보다 좀더 화려한 영락장식이 있고, 정면성 탈피하여 몸을 약간 비틀면서 자연스럽게 서 있어 몸의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감산사석조미륵보살의 경우처럼 천의가 가슴을 가로질러 대각선으로 걸쳐지고 있다.
신라 하대에 들어서면 귀족불교는 보다 민중적인 선불교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되고, 따라서 서라벌 중심의 불교도 호족세력이 흥왕하는 지방으로 그 터전을 옮기게 된다. 아울러 석가모니나 아미타불보다 비로자나신앙이 민중에 널리퍼지면서 비로자나불상이 많이 조성된다. 한편 불상 조성도 국가재정이 아닌 지방 호족 또는 민중의 보시로 이루어진다. 한편 불상의 재료도 석불 일변도에서 철불 등으로 서서히 바뀌고, 불상의 표현도 이상주의에서 현실주의로 서서히 옮겨간다.
신라의 철불은 8세기 중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9세기 때 전성을 이룬다. 현존하는 철불 역시 거의가 9세기 때의 것이며, 비로자나불이 상대적으로 많이 조성되었다. 비로자나불 신앙은 9세기에 전성하는데, 현존하는 철불들은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상,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상, 남원 실상사 철조약사여래좌상, 청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등에서 보듯이 경주가 아닌 지방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이는 신라말 중앙정부의 혼란과 지방호족들의 흥왕이라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