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般若心經) 강의
반야심경은 대승불교의 반야부경전 중 하나로 원 제목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다. 이 경은 불교의 모든경전중 짧으면서도(260글자) 그 품은 뜻은 여타의 다른경전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어 불교의 모든 의식에서 반드시 독송되고 있는 중요한 경전이다.
2장 몸과 마음은 텅 빈 것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心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옮김>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춰 보고 일체 고액을 건넜다.
<풀이>
우리들이 선망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격자,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완성자다. 그 지혜를 통하여 우리의 몸을 위시해서 모든 현상계와 온갖 감정의 세계를 텅 빈 것으로 깨달아 안다. 몸도 마음도 텅 비었기에 일체 고난과 불행과 문제들은 있을 수 없다. 고난이니, 불행이니, 문제니 하는 것은 결국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두말 할 것 없이 내 몸을 중심하여 나라는 것, 나의 것이라는 것 등 많고 많은 감정들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반야의 삶을 통하여 모든 고난과 문제를 해결하였다.
<해설>
여기서부터 경문의 시작입니다. <반야심경>은 다른 경전에 비해 그 구조가 약간 다릅니다. 대부분의 경전에서는 '내가 이와 같이 들었다'라는 "여시아문(如是我聞)"이란 구절이 맨 먼저 나옵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경전 성립의 배경 설명이 생략되고 바로 본론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반야"의 진수를 뽑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독송되고 있는 <반야심경>의 본문 첫 구절은 "관자재보살"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범서로 된 <반야심경>에는 경의 맨 처음에 '일체지자(一切智者)에게 귀의합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일체지자'란 바로 지혜를 완성완 분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지혜의 완성을 가르친 경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지자에게 귀의한다'는 구절은 <반야심경>이 지혜의 경전임을 잘 나타내주는 귀중한 말입니다.
"관자재보살"에서 "관자재"는 범어의 아바로키테스바라(Avalokitesvara)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은 아바로키타의 '관(觀)'과 이스바라의 '자재(自在)'를 합한 것입니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은 '보는 것에 있어서 자유자재한 분'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관자재보살"은 지혜에 의한 바라밀행을 실천하는 주체가 되는 분입니다.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의 괴로운 마음을 그 직관지(直觀智)로 투시하는 보살입니다. 또 관세음보살은 부처님의 자비가 인격화된 분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모든 것을 두루 살피고, 알고, 듣기 때문에 우리를 고난에서 구해주는 분입니다. 우리가 부르기도 전에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아기를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아이가 부를 때만 보살펴 주는 것이 아니라 부르지 않아도 항상 어머니의 관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관자재보살"은 "반야바라밀다"의 실천자입니다. 반야의 힘으로 우주와 인간의 근본 실상을 확연히 보는 것입니다. 반야의 실천 내용은 곧 자비행입니다. 자비를 통한 반야의 실천을 완성하는 자로서 "관자재보살"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관자재보살"은 궁극적으로 진리를 실현하고 반야의 완성을 통해 피안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관자재보살'에서 보살의 의미를 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임말입니다. 보리살타는 범어로 보디사트바(Bodhisattva)라고 합니다. 보디사트바는 깨달음을 나타내는 '보리'와 중생을 뜻하는 '사트바'를 합한 것으로 불교의 이상적인 구도자상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즉, 깨달음을 완성한 부처와 미혹된 중생의 두가지 속성을 가진 자가 바로 보살입니다.
그래서 보살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실천하는 분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넓은 의미로 볼 때 보살은 올바른 인생을 살려고 노력하며 꿈꾸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살이란 보다 낳은 인생을 위해 꿈과 희망과 포부를 갖고 향상을 꾀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잠깐 "관자재보살"의 여섯 가지 구체적인 실천 덕목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에 대해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는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입니다. 보시는 주는 행위를 말하는데,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재물을 주는 행위를 재보시(財布施)라 하며, 진리를 일러주는 행위를 법보시(法布施)라 하며,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행위를 무외시(無畏施)라 합니다.
둘째는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입니다. 지계는 계율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곧 행도을 절제할 줄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셋째는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입니다. 인욕이란 고난을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는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입니다. 정진은 진리의 길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섯째는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입니다. 선정은 정신을 흩어지지 않게 안정시키며, 사념(思念)의 근원을 투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앞의 보시, 지계, 인욕, 정진바라밀을 실천함으로써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선정바라밀입니다.
여섯째는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입니다. 지혜바라밀은 앞의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바라밀을 실천함으로써 얻어지는 최고의 지혜를 획득하는 일입니다. 또 최고의 지혜를 얻기 위한 모든 노력을 말합니다.
이상의 여섯 가지는 보살이 이상적인 경지인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서 실천해야 하는 중요한 덕목입니다. 바라밀은 생각만 갖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바라밀은 그것을 닦는 자만이 그 진가를 알고 성불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心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옮김>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춰 보고 일체 고액을 건넜다.
다음으로 "행심반야바라밀다시"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행한다'는 것은 반야를 실천에 옮기는 일을 말합니다. "심반야"는 깊은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공의 실상을 꿰뚫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라밀다"는 경의 제목에서 살펴 보았듯이 도피안, 즉 '저 언덕을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행심반야바라밀다시"를 좀 더 자세히 풀어보면 '깊은 지혜로써 저 언덕을 건너가는 도리를 실천할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깊은 지혜로써 문제가 해결된 상태를 뜻합니다.
"관자재보살"은 깨달은 분이기 때문에 중생의 삶처럼 고뇌와 문제가 가득한 삶이 아닙니다. 지혜로써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인생이며, 저 언덕에 건너간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깊은 지혜로써 저 언덕을 건너가는 것일까요? 그 해답은 바로 그 다음 구절에 이어지는 "조견오온개공"에 있습니다.
"조견오온개공"은 '오온이 모두 공한 것으로 비춰본다'는 뜻입니다. "조견"의 뜻을 좀 더 선명히 번역하면 '밝히 본다' 또는 '저 먼곳으로부터 내려다본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오온
"오온"은 범어로 판챠 스칸다(Panca Skadha)인데 그 뜻은 '다섯 가지 쌓임'이란 말입니다. "온"은 화합하여 모인 것을 뜻합니다. 오온은 곧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구성 요소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 구체적인 것으로는 색온(色蘊),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의 다섯 가지를 말합니다.
색온은 스스로 변화하고 다른 것을 장애하는 물체를 말합니다. 인간의 육신을 위시해서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은 색온에 해당됩니다. 색온의 본래 의미는 '무너진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물질의 특성은 언젠가는 없어져 버릴 것이며, 인간의 육신 또한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四大)로 흩어져 사라지는 것입니다.
수온은 고(苦)와 락(樂), 불고불락(不苦不樂)을 느끼는 마음의 작용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수온은 괴롭다 즐겁다, 좋다 나쁘다, 달다 쓰다 등의 감각을 느끼는 일차적인 마음의 감수작용인 것입니다.
상온은 외부로부터의 사물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상상해보는 마음의 요소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배척하는 등의 마음작용을 상온이라 합니다. 상온은 일종의 지각(知覺) 작용을 말합니다. 느낌이나 감각의 인상을 머리 속에서 정리하는 표상(表象) 작용을 일컫는 것입니다.
행온은 인연으로 생겨나서 시간적으로 변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합니다. 즉, 앞에서 받아들인 마음의 작용이 계속 이어지는 상태를 행온이라 합니다. 행온은 분별한 감정을 생각으로 굴려서 마음의 행위를 계속 이어나가는 의지와 행동 작용을 말합니다. 또한 잠재적이고 무의식적인 충동력을 행온이라 합니다.
식온은 의식하고 분별해서 아는 마음의 인식작용을 말합니다. 또한 식온은 모든 인식의 주체가 되는 마음의 작용을 이르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식을 한꺼번에 일컫는 것이 식온입니다.
"오온"의 다섯 가지 중에서 수.상.행.식의 네 가지 정신작용은 아주 미묘해서 정확하게 선을 그을 수 없습니다.
"오온"에서 색온은 인간의 육신에 해당되는 부분이고, 나머지 수온.상온.행온.식온은 인간의 정식적인 면에 해당됩니다. 인간의 정신작용은 육체보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에 세분되어 나누는 것입니다.
"오온"을 쉽게 풀이하면 '몸과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다섯 가지 작용 때문에 인간으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오온"은 불교의 인간관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오온"으로 관찰한 것입니다. "오온" 중에서 수.상.행.식의 작용은 복잡하고 연쇄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을 산다고 했을 때 먼저 좋다, 나쁘다의 수온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런 상상의 끝에 가면 물건을 사게 되는데, 그것은 행온작용입니다. 이어서 식온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그 물건에 대해 관찰하고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등의 구상작용을 말합니다.
개공
게속해서 "개공"은 '텅 비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서론에서도 잠깐 살펴 보았지만 여기서 "공"에 대한 설명을 좀 더 자세히 부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에는 두 가지 성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변성(不變性)과 가변성(可變性)입니다. 불변성은 그대로 진(眞)의 차원이고, 가변성은 여(如)의 차원입니다.
예를 들어 꿈을 꾼다고 했을 때, 꿈을 깨고 나면 꿈 속에서 일어 났던 일은 온데 간데 없고 그대로 이불 속에서 편안히 누워 있는 상태는 진의 차원입니다. 반대로 꿈 속에서 꿈을 꾸는 동안 온갖 장애가 일어나는 것은 여의 차원입니다.
본문의 "오온개공"도 위의 두 가지 입장에 비추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오온" 그 자체가 그대로 "공"이며 진리라는 입장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온"은 영원불변한 것의 한 표현인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오온'은 가변적이어서 환영적(幻影的)이며 비실재적(非實在的)인 것이라는 차원입니다. 이것은 여의 입장입니다. 대부분 "오온개공"을 가변적인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에 대한 다른 해석도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존재의 실상 그대로가 "공"이기 때문에 "공"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자면 "공"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있는 것은 더욱 아닌 것입니다. 유(有)와 무(無)를 초월한 존재의 실상이 바로 "공"입니다.
"조견오온개공" 즉, '몸과 마음을 텅 빈 것으로 비춰본다'는 것은 현상적으로는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자아(自我)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존재를 한꺼풀 벗겨놓고 보면 몸과 마음이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꼭두각시 인형 놀음을 보고 있으면 온갖 희노애락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장막을 걷어 버리면 인형들의 희노애락은 한낱 손놀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모두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실상은 그대로 텅 빈 것인데도 불구하고 집착과 아집에 가려 인형들의 놀음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괴로움에 가득 차 있다고 해도 몸과 마음이 텅 빈 것이라고 한다면 괴로움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이 무심(無心)의 경지에 들게 될 때 문제는 이미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존재의 실체를 텅 빈 것으로 바로 아는 일이 곧 반야입니다. 근본이 텅 빈 것이라고 해서 허무하거나 무상한 것이 아닙니다. 텅 비었다는 것은 무한히 변화, 발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텅 비었을 뿐 아니라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은 감정이 그 현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감정이 영원한 것인 양 착각하여 탐.진.치 삼독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입니다.
흔히 자존심을 건드려서 감정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자존심이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입니다. 자존심이 마치 자기 자신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이 습관화된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삼독심으로 가득 차 있어서 다른 어떤 것도 그 안에 들어갈 틈이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자기라고 하는 아집으로 꽉 막혀 있을 때에 다른 것이 비집고 들어가게 되면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을 텅 빈 것으로 보는 지헤가 필요합니다. 존재의 법칙은 텅 빈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실상이 텅 빈 것이라는 사실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의 접시가 있다고 할 때 겉모양으로 보면 빈틈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접시의 구성을 물리학적으로 관찰하면 분자와 분자가 결합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자와 분자 사이의 공간이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거리입니다.
분자와 분자 사이의 거리를 쉽게 이해하자면 그것은 지구와 태양의 거리보다 훨씬 더 길고 넓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먼 거리를 분자와 분자의 인력에 의해 서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목은 분자와 분자 사이의 인력 때문에 마치 접시가 꽉 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물을 들 수 있습니다. 물이야말로 아무런 공간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출렁거립니다. 물은 겉으로 보기에는 꽉 차 있어서 그 어떤 것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물의 분자와 분자 사이에는 다른 것이 들어갈 공간이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마시는 청량음료는 물의 분자와 분자사이에 탄소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병 뚜껑을 열면 탄소 거품이 물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정한 물의 양 속에 탄소를 집어넣어도 물의 양은 변함이 없습니다.
요즈음의 과학에서는 분자를 나누어서 미립자, 소립자까지도 분리합니다. 어떤 물질이든지 아무리 작게 나누어도 또 나눌 것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빈틈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텅 빈 공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과 정신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는 저마다 다릅니다. 자기 자신의 안목대로 인생을 살기 때문에 각양각색의 인생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자만과 아집으로 가득찬 인생은 시시각각으로 문제를 일으킵니다.
"조견오온개공"의 안목으로 볼 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텅 빈 것으로 바라보는 지혜가 생겨날 때 삶은 더욱 발전되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꿈꾼다면 몸과 마음을 텅 빈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작은 나에 집착하지 말고 큰 나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럴려면 몸과 마음이 텅 비어서 결국 공한 것으로 비춰봐야 합니다. 성공적인 인생이 거기에 있습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心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옮김>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춰 보고 일체 고액을 건넜다.
다음으로 "조견오온개공"의 결과가 "도일체고액"입니다. "도일체고액"의 뜻은 '일체의 괴로움을 건너간다'는 말입니다. 일체의 괴로움을 건너간다는 말은 결국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상태를 뜻합니다.
"도"라는 말은 '건넌다'.'초우 한다'.'제도한다'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도"란 괴로움의 세계에서 즐거움의 세계로 건너가는 도피안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을 건진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도"의 의미는 일체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를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일체"라는 말은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일체"라는 말을 잘 씁니다. "일체"의 의미를 보다 선명히 이해할 수 있는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부부싸움 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은 갑자기 싸우는 부부 앞에 나아가 자기가 잘못했노라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생전 처음 보는 알지도 못하는 스님이 잘못했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스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문제 속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일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일을 막론하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은 "일체"라고 하는 말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고액"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바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문제는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도처에 산재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몸에 병이 나서 아픈 것도 문제이며, 남편의 승진도 문제이며, 자녀의 진학도 문제에 해당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감당하지 못하면 마음은 늘 괴롭고 어두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란 우리에게 아프고 쓰라린 강물과 같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고액"은 넘고 또 넘어야 할 거대한 산과 같으며, 건너고 또 건너야 할 엄청난 강입니다. 또 "고액'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가지 뇌리에 남아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액"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 지혜는 몸과 마음이 텅 빈 것이라는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아프고 괴로운 일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몸과 마음이 텅 비어서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괴로움이 아닌 것입니다. 즉 괴로움의 실체는 없는 것입니다. 존재의 실상이 공하다는 인식에서는 일체의 고통이 저절로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반야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계속되는 상처로 얼룩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캄캄한 밤길에 혼자 집으로 가려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상처를 입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상처뿐인 캄캄한 밤길이 아닌 밝은 태양이 빛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존재의 실상이 공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반야의 길입니다.
존재의 실상을 지혜의 눈으로 환히 꿰뚫어 볼 때 비로소 모든 것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으며,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지도 못할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반야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반야는 곧 공에 대한 확실한 인식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불교의 존재 목적은 보다 나은 행복한 삶을 누리는 데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공사상은 이론적인 논리를 전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육신과 정신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온"이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느냐에 대한 이해가 더욱 중요합니다. 반야심경은 그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온"의 존재 양상이 바로 "개공"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텅 빈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텅 빈 모양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곧 지헤이며, 그것이 문제해결의 핵심임을 거듭 강조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없는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있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데서 행복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텅 빈 것으로 보면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지고 거기에 진정한 행복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 매달려 잘못된 관념 속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존재의 실상이 어떤 모양으로 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늘은 텅 빈 것처럼 보이지만 무수한 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하늘이 텅 비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과 마음도 꽉 차 있는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텅 빈 것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모든 존재의 실상은 바로 그런 모습으로 있는 것입니다.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가 있다고 보는 것은 인연의 끈에 의해 잠시 있을 뿐입니다. 인연에 의해 잠시 존재하게 되는 이유 또한 공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이나 기쁨, 미움이나 성냄 등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감정들도 인연에 의해 잠시 일어난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의 실체는 텅 비어서 없는 것입니다. 한 순간 감정을 만나면 영원히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현자로 장자(莊子)가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 속에 "유인(遊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뜻은 '칼을 가지고 자유자재하게 매우 잘 쓴다'는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엣날에 소를 아주 잘 잡는 백정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소를 잘 잡기로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어느 날 왕에게까지 그 소문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왕은 어떻게 하여 그가 소를 잘 잡는지를 보려고 푸줏간으로 갔습니다. 그 백정은 소를 잡아 살을 뜨고 뼈를 가르는데 마치 곡조에 맞추어 춤추 듯 하였습니다. 그 모습은 하나의 예술로 승화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왕은 감탄한 나머지 그에게 칼을 멈추게 하고 어떻게 하여 소 한 마리를 그렇게 잘 가르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백정이 되었을 때는 소가 한 덩어리로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소 한 마리가 살과 뼈로 완전히 분해되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소 한 마리를 잡을 때 완전히 분해된 상태에서 텅 빈 공간과 공간 사이를 지나면서 칼질을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완전한 음악의 동작에 맞추어 텅 빈 공간을 딸 춤추 듯 칼질한다고 해서 "유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인"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 한 마리의 진짜 모습은 무수히 많은 공간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즉, 존재의 실상은 꽉 차 있어서 아무 빈틈이 없는 것이 아니라 텅 빈 공간이 무수히 많은 것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백정은 소 한 마리를 볼 때 뼈와 살을 완전히 분해하여 텅 빈 공간까지를 보는 것입니다. 텅 빈 것을 분해하기는 아주 쉬운 일입니다. 게속되는 훈련을 통해 도의 경지에 도달한 백정은 소 한 마리를 볼 때 처음부터 텅 빈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날 하나 상하지 않고 쇠고기를 자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물론이거니와 인생 자체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체의 것이 있다고 하는 데서 괴로운 것입니다. 자의식(自意識)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랑한다, 미워한다, 나는 있다, 이것은 내것이다 등등의 소유의식은 그 연장선상에 많은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하루 아침에 이런 일체의 감정을 다 지워버리기는 어렵겠지만 존재의 실상이 본래 텅 빈 공의 상태임을 확인하고 실천에 옮길 때 언젠가는 지혜의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태양보다 밝은 광명으로 존재의 실상을 인식하게 되어 더 이상의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봄이 되면 잎이 무성하게 피는 듯 보이지만 곧 가을이 되면 하나 둘 잎이 지듯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문제들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 어떤 가르침보다 공의 가르침은 우리의 병을 치료하는 최상의 약이 됩니다.
이상에서 볼 때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은 바로 불교의 목적이며, 우리 인생의 길잡이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진수를 깨닫는 것이며, 불교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그 나머지는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고 해도 될 만큼 이 구절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결국 <반야심경>의 주된 안목은 우리의 몸과 마음, 즉 육신과 정신 세계를 텅 빈 것으로 관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고 또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