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9-09-14 10:41
[사찰문화실] 불교미술이란 무엇인가? ⑤ 불교미술 감상법 하나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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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미술 감상하기 ①


성덕대왕신종

사실 불교미술을 포함한 모든 미술 작품을 완성 상태에서만 감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지나치게 보는 사람 위주의 감상법이다. 연극의 삼요소가 무대·배우·관객이라고 하는데, 미술도 그 같은 예를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작가·작품·감상자의 세 가지 요소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감상자란 곧 일반 대중 혹은 연구자들을 가리킨다. 아무리 훌륭한 작가가 위대한 걸작을 탄생시켰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고 환호작약하는 대중이 없다면 그것에 전정한 의미가 있을까? 작가 한 사람만 이해하고 만족해하는 미술이 과연 얼마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미술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흥을 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얻게 된다. 이것을 예술의 사회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작가의 창작 행위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매우 중요하다. 물론 근현대 작가도 아닌 옛날의 불교미술을 만든 사람의 의도를 지금에 와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어느 작품을 만들 때 동원되었을 기술을 꼼꼼히 따져보는 것은 가능하다. 그럼으로써 작가의 의도까지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작품에 나타난 당시의 보편적 미술관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력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서 작품이 완성되는 실질적 과정을 살펴보는 것을 말한다.

 기술력을 통해서 어떤 작품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는 예는 매우 많다. 예를 하나만 들어본다면,
통일신라시대인 771년(혜공왕 7)에 만든 신라의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은 형태의 아름다움이나 크기로 볼 때 누구나 우리나라 최고의 범종으로 꼽는다.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어 그 위상에 걸맞는 대우를 받고 있기도 하다. 이 범종은 기능적으로 보더라도 만들어진 지 1,30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도 제야나 특별한 날에는 타종되어 그 그윽한 울림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옛날 사람들의 대단한 기술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겉면에 새겨진 비천상 등의 화려한 조각을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금속학적 성분 분석을 시도하는 것도 이 범종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데 매우 요긴하다. 이 범종을 일명 ‘에밀레종’이라 하여 종을 만드는 쇳물에 살아 있는 어린아이를 넣어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있는 전설이다.
성덕대왕신종 - 비천상


 하지만 이 이야기는 아무런 설화적 근거도 없는 오로지 지어낸 말에 불과하다. 아무리 중요한 범종을 만든다고 해서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을 종의 재료의 일부로 사용했겠는가? 이 터무니없는 말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우리의 자의식을 망가뜨리고 자기비하를 유도하기 위해 날조한 것일 뿐이다. 그 이전에는 어떠한 기록이나 구전에도 이러한 말이 있지를 않았었다. 그러나 한번 유포된 이야기는 묘하게도 마치 사실인 양 널리 퍼져 근래에 이르기까지 이런 말을 무의식중에 그럴 듯한 이야기로 믿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이 종에 사람 뼈의 성분인 인(燐, phosphorous)이 다량 함유되어 있을 거라는 말까지 나왔었다.  사실 이 말의 이면에는 불교를 낮추어보는 감정이 밑바탕에 깔려있음이 물론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엉터리라면 그것을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1990년대 중반 우리나라의 범종 기술학자들이 이 범종의 성분을 조사한 일이 있었다.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당시로서의 최첨단 장비를 동원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공학적·화학적, 그리고 금속학적 연구 등 한번 제대로 마음먹고 실시한 대대적 조사였다. 그 결과 여러 가지 새롭고도 중요한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 범종에는 인 성분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앞서의 이야기가 얼토당토않은 말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아울러 통일신라시대의 우리 선조들이 작품 하나를 위해서 사람의 목숨까지 바치는 비인륜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음도 밝혀지게 되었다. 이렇게 한 작품에 대한 기술력 연구는 자칫 종교성을 무시한 채 떠도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헌 연구나 양식 연구로는 밝혀낼 수 없었던, 악설(惡說)이나 속설을 시원하게 떨쳐버리는 일도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감상자는 몰라도 적어도 미술사 연구자들은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와 부단하게 대화해서 그들의 기술력과 생각을 알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불교미술 감상하기 ②
 불교미술이 아직도 그 가치가 인정되고 대중을 위해 생산되는 곳은 세계적으로 아주 드물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나라는 가장 활발히 창작이 이루어지는 나라로 꼽힐만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미술 작가들의 활동이 가장 왕성한 곳이라는 얘기인데, 하지만 아쉽게도 이 작가들과 학자들 사이에 진지한 토론과 작품에 대한 상호이해가 만족할 만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서로의 벽이 높아 교류가 되지를 못하는 것인데, 현재 우리의 불교미술이 신라나 고려 때만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작품을 감상하는 조건 가운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 작품에 대한 역사적 가치와, 옛 사람들이 그 작품을 보고서 어떠한 생각을 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지금의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역사적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사실 이 일은 이른바 문헌조사라는 작업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소 지루하면서도 쉽지 않은 공력을 들여야 한다.  
 하지만 또 하나는 그 작품의 양식을 연구해서 완성도와 미적 성취 등을 확인하는 일이다. 양식(樣式)은 한 작품의 형태적 특징과도 같은데, 영어로 Style이나 Type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양식은 일명 형식(形式)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미술작품이 언제쯤 만들어졌으며 어떤 작품의 영향을 받았고 또 어떤 작품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는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어떤 면에서 미적 성과를 이루었는지는 대개 양식 연구로 결론짓게 되는 경우가 많다.
 미술작품에 있어서 양식 또는 형식 연구는 그만큼 중요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상당수의 불교미술사 연구자들이 지나치게 양식 연구에만 치우쳐 기술력과 문헌 연구를 그만큼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인데, 올바른 작품 이해를 위해서라도 이러한 풍토는 앞으로 고쳐져야 한다.  이렇듯이 하나의 미술 작품이 어떠한 기술력을 동원해서 이루어졌고, 문헌을 통해 이 작품에 대한 역사성이 무언인지 확인한 다음, 그러고 나서 그 작품의 양식을 연구한다면 그 작품의 의미가 더욱 각별할 수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은 사실 불교미술의 경우 더욱 더 절실히 살펴봐야 할 요소들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을 다 갖춘 연구 성과는 찾아보기 아주 드물다. 여기에 불교미술에서는 종교성이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종교적 의미가 없는 작품은 불교미술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봐야한다. 따라서 불교미술은 앞에서 말한 기술·문헌·양식, 이 세 가지 요소에 종교성이 곁들여질 때 만인의 찬탄을 자아내는 진정한 예술로서의 가치가 부여된다고 볼 수 있다.

<사찰문화연구원 / 현대불교미디어센터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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