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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7-06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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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공부방] [천수경] 본장 - 9 서원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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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8,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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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국토(佛國土)의 구현을 위하여
발사홍서원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중생무변서원도>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란 가없는 중생들, 그리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그들 모두에게 나의 형편 닿는대로 부처님 전에 공양하듯 베풀어 주고, 공부한것 한마디씩이라도 그들에게 전해 주어 끝없는 중생들 모두를 제도하기를 서원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나 성당에서는 교리가 마음에 와 닿는다고 하지만, 불교는 마음에 와 닿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에 파고들어서 마음을 변혁시키는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와 닿는 정도 가지고야 어떻게 그 마음을 변모시킬 수 있겠습니까? 보통 중생들은 천번 만번 들어도 `소귀에 경 읽기'이기 쉽습니다. 마음에 파고들어 뒤흔들어 놓아야 그 마음이 조금씩이라도 변모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어느 자리에 가서 부처님 말씀을 전하게 될 때 그들을 압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전하는 바로 그 자리가 반야선이 되고 연화대가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서울 곳곳에 가서 부처님말씀 전하면 서울 시내가 반야용선이 될터이니까 그것을 보시는 부처님 마음은 얼마나 좋으실까요? 여러분들도 가능한 한 자기 능력대로 부처님 말씀 전하셔서 그 어느 곳이든 반야용선을 만드십시오. 가정이면 가정을 반야용선을 만들고, 동창 모임이면 동창 모임을 반야용선을 만들고, 학부모 모임에 가면 학부모 모임을 반야용선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 계속해서 반야용선을 서울시내 곳곳에 띄워가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모이는 곳곳마다, 가정법회 소구역 하나하나 그 모두가 다 반야용선이 될 것입니다. 그 반야용선을 타고 우리들은 함께 영원의 항로를 나아가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노력하고 노력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어려운 문제일까요? 다만 노력하고 정진하기가 어려울 뿐이지, 내 마음의 문을 열면 부처님은 항상 허공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데 어려울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행(行)을 그대로 하면 부처님이 항상 그 곳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면 부처님께서 그 자리에 내림하신다 하셨으니 내 모든 정성 다 해 무변한 중생들을 다 반야용선에 태워야 되겠습니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과 쓰라림을 우리 모두가 기회 닿는대로 아물게 해야만 되겠습니다. 여러분 하나하나가 다 전법사가 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본래 부처님의 아들 딸들입니다. 본래 부처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깨닫고 있지 못한 탓에 중생이라 부릅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이와 같이 깨닫고 못깨닫고의 한 생각 차이라 하셨습니다. `한 생각 깨달으면 그자리가 부처요, 한 생각 어리석으면 그 자리가 중생이라' 하셨습니다.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깨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본래 무한능력자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한 생각 깨달으면 부처입니다. 무량한 부처님들께서 깨달음의 길을 통해 부처의 길을 가셨고, 위대한 성자, 현자들은 모두 이 길을 통해 영원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깨달음의 길을 열어줘야 합니다. 이 길을 모르는 자들은 영원히 암흑속을 헤맬 수밖에 없고 영원히 중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은 광명이요, 등불입니다. 이 땅을 가득 채운 중생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 부처임을 모릅니다. 그러기에 마구잡이로 함부로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이 풍요로운 존재임을 모릅니다. 그러기에 천박한 생활을 능사로 알고 인생을 헛되게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스스로가 부처의 분신임을 일깨워 줘야 합니다. 스스로가 가장 존귀로운 존재임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이 길이 바로 `중생무변서원도'의 길입니다. 우리들 불자들은 스스로가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맹세코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그들은 맹세코 제도하기를 서원해야만 합니다.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의 은혜로운 공덕을 받고서 태어났으며 그 은혜로서 살아가기 때문에, 온 중생은 모두가 일찌기 축복받은 자입니다. 그들은 모두 축복받은 자들이며, 거룩한 사명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거룩한 광명과 은혜로서 살고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자를 중생이라 하였습니다. 저들에게 지혜의 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착각을 일으켜 육체를 자기로 삼고, 듣고 보는 물질로서 세계를 삼으며, 거기서 얻은 생각으로 가치를 삼고 그를 추구하기에 중생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생세계는 겹겹이 장벽에 싸여 있고, 사람과 사람사이는 막혀 있습니다. 중생들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에 잠겨 지냅니다. 이 모두가 미혹의 탓이며, 착각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그릇 인정한데에 기인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깨우쳐야 합니다.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제도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너와 나의 서원이 되어야 하며, 우리 모두의 서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길 가운데, 우리의 가정과 사회위에 생명의 참가치가 구현되며 불국토의 공덕장엄이 구현됩니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가 끝이 없지만 모두 끊겠다는 서원입니다.
중생의 몸이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고 어지럽히고 미혹시켜 퇴락하게 하는 정신작용의 모두를 번뇌라 부릅니다. 중생은 번뇌에 의해 업을 일으키고 괴로움의 과보를 받아 생사의 세계를 헤맵니다. 불교는 번뇌를 끊고 열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번뇌에는 많은 구별이 있습니다. 3독번뇌 5독번뇌 등을 비롯, 8만4천번뇌를 말하기도 합니다. 108번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번뇌들은 성도(成道)를 방해하고, 열반의 길을 차단합니다.
그러나 열반경 등에는 `번뇌 즉 보리'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번뇌 그대로가 보리라는 의미입니다. 중생의 어리석은 경지에서 보면, 미망(迷妄)의 주체인 번뇌와 깨달음의 주체인 보리는 전혀 다른 차원 같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눈으로 보면 그 두가지가 그대로 하나이어서 차별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번뇌는 마음의 때와 같은 것으로 흡사 거울에 때가 묻었기에 닦으려는 마음이 나고, 거울의 때를 닦기 때문에 저절로 맑아지게 되어, 마음의 때가 깨달음을 이루는데 중요한 측면이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또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먼지가 허공에 많이 떠 있으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먼지가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지가 없으면 우리들은 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먼지 입자들에 수증기가 묻어 비가 되는 근본적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우리가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가 내리면 온 세상은 맑아지게 되어져 있습니다.
`번뇌 즉 보리'라는 의미는 이렇게 우리들에게 큰 의미를 지닙니다. 번뇌를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번뇌를 녹여 내려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성불의 길이 열려옵니다. 번뇌가 다 하게 되면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의 자리인 것입니다.
성유식론(成唯識論), 구사론(俱舍論) 등에는 번뇌의 제반 양상에 대해 많은 설명이 등장합니다. 대단히 복잡한 학술적 설명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복잡한 설명은 차치하고라도 우리들은 이른바 3독번뇌 탐·진·치와 5독번뇌 탐·진·치·만·의 등의 번뇌를 끊어가도록 항상 정진해야만 합니다.
문자 그대로 한없는 무진번뇌가 있더라도, 맹세코 끊어 내겠다는 서원속에 불자의 수행생활을 열어가야 할 것입니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이 한 없지만 모두다 배우겠다는 서원입니다.
우리는 성불의 대도(大道)를 걷기 위해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안내자란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경(經)이라 부릅니다. 경은 `길'의 의미이고 성불의 대도를 의미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닦는 작업을 불도(佛道)를 닦는다고 하는데, 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로 불도를 닦아가기 위해 무량한 법문을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법(法)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미하고, 불법(佛法) 교법(敎法) 정법(正法) 따위로 부릅니다. 무릇 진리라 하는 것은 불변의 보편적 도리이므로 법이라 부릅니다. 법은 진리입니다. 진리의 세계는 광명의 세계이기에 진리를 따르는 자, 법을 따르는 자는 한없는 광명의 세계를 열어갑니다. 그래서 법을 따르는 자들에게 펼쳐지는 한없는 세계를 다음과 같이 여러가지로 설명합니다.
불법을 공부하고 들음으로써 얻어지는 기쁨을 법락(法樂), 법희(法喜), 법열(法悅)
불법의 진리에 대한 맛을 느끼는 경계를 법미(法味)불법의 강력한 위신력을 법력(法力)
불법은 열반의 문이기에 법문(法門)
불법을 따르는 자에게 열리는 광명의 세계를 법광(法光)불법은 만중생들의 어둠을 밝히므로 법등(法燈)
불법은 인간중생들에게 혜택을 주므로 법우(法雨)라고 합니다. 그밖에도 법을 바탕으로 한 술어는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그 만큼 법의 세계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세간의 모든 것은 잠깐이요, 번개나 아침이슬 같은 것입니다만, 부처님 법은 영원이며, 영겁의 보배 그 자체입니다. 부처님 법으로 중생은 대해탈을 성취하며, 이 세계는 부처님 법으로 불국토로 승화됩니다. 법이 머무는 곳에 태양이 있습니다. 법이 사라진 곳엔 어둠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부처님 법은 진실로 진리의 태양입니다.
우리들은 부처님 법을 통해서만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불법이 있음으로 해서 중생의 희망도, 국토의 평화도 가능한 것입니다. 중생들이 거짓과 다툼과 고통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중생들이 불법을 모르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진실로 불법은 중생과 세계를 찬연히 밝혀나갈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지혜이며 법입니다.
우리 모든 불자들은 부처님 법을 항상 듣고 공부하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량한 법문을 한도 끝도 없이 공부해야만 합니다. 법문이 무량하더라도 한도 끝도없이 공부하기를 서원해야만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모든 선지식들과 스님들께 설법하여 주시기를 간청해야만 합니다. 이 땅의 모든 불행과 악과 재난을 쓸어버리는 것은 오직 부처님의 법문 뿐입니다. 우리들은 항상 법문 듣기를 서원하고 설법하여 주시기를 간청해야만 합니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가 드높지만 모두다 이루겠다는 서원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가지 도(道)가 있습니다. 많고 많은 종교와 가르침들이 저마다의 도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많고 많은 도가 이 땅에 존재함은 많은 사람들을 어지럽게 만듭니다. 물론 목적지로 가는 길이 한길 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많고많은 길[道]가운데 불도(佛道)를 위없는 도(道)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불도란 바로 부처님과 하나되는 도이고 진리와 하나되는 도이며 절대 그 자체로 승화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도들은 하나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창조주가 있고 피조물이 따로 있는 상대성의 도입니다. 그같은 가르침을 꼭 도라 부를 수 있는지 조차 분명치 않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절대자에 의한 구원이 아니고서는 우리들의 구원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불도는 그 같은 주장을 낮은 차원의 도라고 부릅니다.
우리들은 피조물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무한한 창조주가 있음을 얘기합니다. 우리가 그대로 창조주임을 선언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창조주임을 깨닫고 창조주답게 살아가기를 가르칩니다. 우리 스스로 무한한 창조주임을 선언한 도는 불도 이외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부처님이 항상 함께 계시고 우리가 곧 부처님이라는 가르침은 참으로 장엄한 가르침이요, 위없는 가르침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불도 가운데 부처님과 하나되고 영원과 하나됩니다. 광대무변한 우주는 불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안겨옵니다.
우리는 진정 위없는 불도를 성취할 것을 서원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가득한 번뇌 망상 등을 제거하기만 하면 우리는 무한의 존재와 하나가 됩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갖가지 물질을 바탕으로 한 독심과 악심들의 번뇌가 우리로 하여금 영원과 하나됨을 방해합니다.
불도를 닦는다는 것, 불도를 이룬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번뇌를 녹여 내리고 부처와 하나되는 작업입니다. 참으로 성스럽고 지고(至高)한 값어치를 지닌 숭고한 작업입니다. 우리 모두 위없는 불도를 성취하겠노라는 굳세고 굳센 서원을 다짐해야만합니다.
불도를 다른 말로 보리도(菩提道)니 해탈도(解脫道)니 등등의 술어로 얘기하기도 합니다. 불교는 문자 그대로 도를 닦는 작업입니다. 외부의 힘이 아닌 스스로가 끊임없이 갈고 닦으며 나아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흔히 도로를 내는 작업을 생각해 보면 좀더 이해를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잡초를 제거하고 길을 닦으면 그길을 따라 쉽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생동안 길을 닦아나가다 멈추어 버리면 우리는 다음 생에 그 길의 끝에서 다시 길 닦는 일을 시작해 나가야만 합니다. 우리의 길은 영원의 길이요, 진리의 길이기에 그 길은 부처님 세계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원아불퇴보리심'하면서 물러나지 않는 마음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불도만이 위없는 도이며 영원과 하나되는 도임을 자각하고 쉬임없이 나아가 그를 달성토록 서원해야만 합니다.
자성중생서원도(自性衆生誓願度) 자성번뇌서원단(自性煩惱誓願斷) 자성법문서원학(自性法門誓願學) 자성불도서원성(自性佛道誓願成)
내 마음속에 중생을 맹세코 제도하기 원하옵니다, 내 마음속에 번뇌를 맹세코 끊기를 원하옵니다, 내 마음속에 법문을 맹세코 배우기를 원하옵니다, 내 마음속에 불도를 맹세코 이루기를 원하옵니다. 내 중생부터 제도하고 내 마음의 번뇌부터 끊어가면서 나부터 열심히 법문을 공부하고 나부터 불도를 이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서원입니다. 그리하여 아사지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사지가되어야 친구따라 능인선원에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능인불교학교를 만들어 몸과 마음을 다해 가르치려고 작심을 한건, 누구나가 다 소중한 분들이며, 누구나 다 아사지가 될 수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보리, 목건련들과 연결되어 있겠습니까?
2. 한없는 예경의 마음
귀명례삼보
나무상주시방불(南無常住十方佛) 나무상주시방법(南無常住十方法) 나무상주시방승(南無常住十方僧)(3번)
발원이(發願已), 발원을 마치고의 뜻입니다. 귀명례삼보(歸命禮三寶)란 삼보님께 이 목숨 다 바쳐 예배드리옵니다의 뜻입니다.
우리의 발원은 이제 마쳐졌습니다. 사홍서원 이상의 발원은 더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발원은 삼귀의로 귀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심귀명례'하듯이, 우리들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들께 귀의하는 마음으로만이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발원은 참으로 고귀하고 장엄한 것이기에 그 길은 삼보님의 위신력과 더불어 함께 하는 길입니다. 우리들은 원력의 달성을 위해 항상 삼보님과 하나됨을 선언하고, 한없는 예경의 마음을 지녀야만 합니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마음은 부처님과 하나되는 마음이고, 우리들은 `지심귀명례'를 통해 그를 확인합니다.
나무(南無)의 뜻은 바로 지심귀명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상주(常住)의 뜻은 항상 함께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시방(十方)의 뜻은 언제 어디에서나의 의미입니다. 부처님은 언제 어디에서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처이고 너의 마음 나의 마음이 부처이듯, 이 세상 모두를 부처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곧바로 부처님 마음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우주를, 만상을, 그리고 우리 주변의 모두를 부처님으로 섬긴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삼보님 전에 귀의해야만 합니다.
`나무상주시방불, 나무상주시방법, 나무상주시방승'의 뜻은 `항상 함께 계시는 부처님, 항상 함께 계시는 가르침, 항상 함께 계시는 스님들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귀의합니다'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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