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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7-06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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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공부방] [천수경] (서장) - 허공계의 무량한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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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20,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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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계의 무량한 존재들>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3번) 인간에게 극한 상황이 느껴지는 이유는 물질계적인 3차원의 존재라는 사실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3차원에만 국한되어 있는 존재이고 3차원적 존재라는 사실만을 인정하는 어리석음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극한상황을 느끼게 됩니다. 시간과 공간에 속박된 차원을 의미합니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극한상황이라는 것은 인간이 물질적 한계를 분명히 인식할 때 초래되는 상황입니다. 스스로를 3차원적인 존재로 전락시킬 때만 한계상황이 느껴지게 됩니다. 만일 그 마음 가운데 무한대한 차원을 인정하고 그를 호흡하게 되면 한계상황은 어느결에 눈 녹듯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대한 차원과 하나가되기 위해 기도하고 정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갈등과 대립, 3차원적인 한계상황으로 부터 초래되는 모든 극한상황은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부처님을 모시는 순간에 녹아져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아무리 설명한다 하더라도 이와같은 상황은 3차원적인 언어로는 설명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입을 갈무리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린 다음 자연스럽게 초월세계, 3차원을 뛰어넘는 존재들에 대한 감사로움의 표현인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 安慰諸神眞言)'을 독송하는 것입니다. `오방내외'는 우리가 말하는 `시방'입니다.
고혈압이라든가 당뇨 등등의 육신의 질병 따위로 3차원적 생각에 속박되어 있을 때 이 육신은 한계상황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같은 한계상황을 느끼는 마음으로는 어떠한 질병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인간들의 질병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3차원적인 한계상황으로부터 유래되는 것입니다. 세포들 속에 그 같은 생각이 머금어져 있는 한 질병의 퇴치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 부처님을 모시기만 하면 몸과 마음 가운데 있는 질병은 저절로 녹아져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기도는 3차원을 뛰어넘는 능력을 이끌어 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물질계적인 한계상황이 타파되고 그로부터 야기된 모든 질병들은 자연히 스러져 내립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정진하는 가운데 당뇨가 낫고, 고혈압이 낫고, 변비가 나으며 모든 질병이 다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3차원적인 어떤 질병도 치유해 낼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밝히는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에 모두가 무명에 휩싸여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데아(Idea)를 꿰뚫는 사람들이 참으로 희유하다고 금강경에 나오지 않습니까? 질병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가 자기 스스로 3차원적인 욕망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진 않지만 다겁생래 우리를 항상 지켜보시며 시방삼세에 항상 함께 하시는 허공계의 모든 분들께 예경을 올리는 것입니다.
`안위'는 `고맙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런 뜻입니다. 무한대의 세계에 대한 감사로움과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맛볼 수 없음에도 나의 마음을 무한대의 차원으로 끊임없이 승화시키고 제고시키려는 그러한 부처님의 염원이 담겨진 내용입니다.
우리는 입으로 쓸데없는 소리하지 않고, 3차원적인 소극적이고 비관적이고 부정적이며 원한에 서린 말을 떨쳐내고, 오방내외에 계신 모든 삼세제불보살님과 화엄신장님께 `감사합니다'하는 기도를 올려야만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제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 정진하고 참선을 하며 공부해 왔지만 불경에 나오는 한자 한자의 순서와 배열이 철두철미한 진리성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놀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경전의 해설자들도 그것이 주는 뉘앙스와 의미를 부처님의 마음따라 올바로 간취하거나 올바로 파악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이 불교의 불행이고 비극입니다. 문자 그대로 그냥 해석해 내려가고 그것으로 끝을 낼 수 밖에 없겠지만, 밝은 눈으로 보면 전후좌우의 배열과 그 안에 들어있는 무궁무진한 의미를 생각해야만 될 그런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입을 청정히 하라. 진리에 입각한 말을 하라. 그 깨끗한 입과 깨끗한 마음으로 오방내외에 계시는 모든 신장들에게 예경을 올려라' 여기서부터 우리들의 기도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우리의 마음은 우주로, 부처님 세계로, 그리고 신장님들의 세계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이른바 물질계적인 극한상황을 초극할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나의 한계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힘은 나의 욕망과 탐욕에 포로가 된 마음을, 그리고 나를 속박하는 갖가지의 부정적인 양태의 사슬을 과감히 끊어내게 합니다. 참다운 기도에 의해 그와 같은 힘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한대의 차원을 머금으면 머금을 수록 나의 마음은 한도 끝도 없는 우주로 달려가기에 세속의 모든 허망한 욕망들은 저절로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끊임없이 기도를 하며 살면 3년 전이 다르고 2년 전이 다릅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3차원적인 한계상황이 점차로 초극되어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열심히 기도하고 살면 물질계적인 자기를 제압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신(神)과 신장(神將) 불교에서 말하는 신장(神將)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神)과는 패턴이 다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가다가 신을 보았다 했고 또 파티마니 루르드 등의 장소에서 성모 마리아를 목격한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신장은 꼭 외부에 있는 존재들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 신장이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들 가운데 살아있는 중생들에게 메시지를 던지게 될 때 신이라고 생각하게 될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밑바닥에, 나의 마음가운데에 영원의 존재와 하나가 되는 존재가 있음을 분명히 확신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같은 사람들은 외부에 뭐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신이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의 패러독스 역시 거기에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란 존재는 내용에 있어서는 불교의 신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신을 인간과 전혀 구별되는 존재로서 창조주로 등극을 시킵니다. 불교에서의 신이란 인간과 구별되는 존재가 아니며 우리의 마음과 둘이 아닌 존재로 얘기합니다. 기독교가 2원론이고 불교가 1원론인 차이가 신에 관한 이해로서는 현격한 차이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신과 인간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하지만, 불교에서는 그같은 차별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예에서와 같이 불교에서는 모두가 하나입니다. 우리가 갈고 닦으면 언제든지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어가는 과정 가운데 거치게 되는 존재들을 신장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마음이 부처이고 우리 모두 부처입니다만, 그 사실을 깨닫고 닦은 정도가 다르기에 차별이 나는 것입니다. 본래는 모두가 다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귀신이란 존재는 모두가 부처가 되어가는 과정의 존재인 것이고 우리들의 본질적 자화상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살아있는 귀신'이며 `죽은 귀신'들은 허공계에 가득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나 보이지 않은 세계 역시 하나인 것입니다.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은 바로 우리들의 의식 영역을 보이는 세계로부터 보이지 않는 세계로, 3차원으로부터 무한대한 차원으로, 극한상황으로부터 해탈의 상황으로 넓혀가는 것입니다. 극한상황을 깨뜨리는 것이 해탈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의미는 3차원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의 근본명제 가운데 아주 어려운 난 문제중의 하나가 바로 `극한'이라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극한'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모두가 무한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은 3차원적 세계로부터 극한상황을 타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극한상황이란 무한대차원과 3차원 사이의 장벽을 말합니다. 이 장벽에 부딪쳐 뚫고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저앉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저앉는 사람은 고뇌를 느끼고 죽음을 느낍니다. 투쟁을 하게 되고 죄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것을 뚫고 나가버리면 고뇌도 없고 죽음도 없고 투쟁도 없고 죄악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지요. 불교는 이렇게 기가 막히게 풀려가는 것입니다. 어려울게 하나도 없습니다. 차원만 뛰어 넘으면 간단한 것을 그 한계상황과 물질계에서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바로 중생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하는 것입니다. 오방내외 즉 시방삼세에 계신 무한대한 차원의 많고 많은 무량한 제불보살과 화엄신장께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정진하며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예경을 올리는 것입니다. 인사드린다는 것은 그들을 내 마음 가운데 품는 것입니다. 그들을 인정하고 내 마음 가운데 받아들이기만 하면 나는 그 순간부터 고뇌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모든 허망한 세계로부터도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되고 욕망 때문에 싸울 이유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기도를 하면 남과 다투고 싶은 마음이 녹아져 버립니다. 물질로부터 해방되니까 참회도 되고 업장도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이것이 불교가 표방하는 부사의(不思議) 해탈경계입니다. 내 마음 가운데 부처님을 모시고, 오방내외에 계시는 모든 신장님들을 모시고, 관세음보살님, 화엄성중님, 지장보살님 전에 기도 드릴 때 모든 죄와 업장이 녹아져 내리고 고뇌로부터 해방됩니다. 죽음의 먹구름이 흩어지게됩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에겐 죽음이 초월됩니다.
내 마음 가운데 미움이 있으면 남이 나를 미워하고 내 마음 가운데 원망감이 있으면 남이 나를 원망하게 됩니다. 원한이 원한이 되어 끊어지지 않으니까요. 내 마음 가운데 항상 감사로운 마음이 있고, 죽음의 공포가 전혀 없고 불생불멸을 확신한다면 어떤 액난에서도 괴롭지 않습니다. 교통사고조차 무섭지 않습니다. 내 마음 가운데부처님을 모시고 살면 혼탁한 세상에서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자명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한대의 세계를 열어 주는 그러한 천수경을 앞에 놓고 공부를 하게 되면서 우선 `부처님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님 감사합니다' `화엄성중님 감사합니다'하는 마음으로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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