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9-07-16 14:48
[기타자료실] 지혜와 자비의 의미와 실행/종범스님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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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자비의 의미와 실행***

 


[법화경]<오백제작수기품>에 보이는 자비복지사상(3)

지난 글에서 “내가 지혜로워야 세상을 지혜롭게 할 수 있고 내가
자비로워야 세상을 자비롭게 할 수 있다.” 는 말을 하였다.
그렇다면 지혜와 자비의 의미는 무엇이며, 지혜와 자비를 실행하는 데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지혜는 다름이 아니라 ‘바르게 보는 것’ 이다.
바르게 보는 것을 정견(正見)이라 한다.
정견은 진실하게 본다는 의미에서 진실견(眞實見)이라 말하기도 한다.
정견과 진실견은 지혜의 능력이며 지혜의 작용이다.
이것은 지혜가 아닌 어리석음에서는 바르게 보지 못하는 사견(邪見)에
빠져있고 진실하게 보지 못하는 허망견(虛妄見)에 매여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기도 하다.

지혜는 무엇을 바르게 보는가?
지혜는 중생의 몸과 생각이 무상한 것임을 본다.
무상이란 변하는 것이다.
몸도 순간순간 변하고 생각도 순간순간 변한다.
몸이 변하는 것을 자세히 보면 어제의 몸은 이미 사라졌고
오늘의 몸이 새로 생겼다.
내일이 되면 오늘의 몸은 사라지고 내일의 몸이 새로 생긴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한 생각이 사라지고 다음 생각이 일어난다.
이 일을 끊임없이 되풀이 한다.
이것을 생멸법(生滅法)이라 하고 변역법(變易法)이라 한다.
몸도 생각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변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한다.

변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은 괴로움이다.
늘 불안하고 편할 날이 없다.
이렇게 변하고 괴로운 것은 내가 아니다.
무아(無我)이다.
지혜는 무상하고 괴로운 것은 자아가 아니고 무아임을 바르게 보고
진실하게 보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는 오온(자아)이 모두 공한 것임을 밝게 보면
온갖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하였다.

지혜는 세계의 사물이 서로서로 관련지어져 있음을 본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
작은 것에도 큰 것을 포함하고 있고, 큰 것에도 작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어떤 것도 홀로 생겨서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포용하고 있다.

전문용어로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세계라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화엄경』의 말씀이다.
『화엄경』을 공부하여 진리를 깨달은 신라시대의 의상스님은『법성게』의
저술에서 “하나의 미세한 먼지 속에 시방세계를 포함한다.
(일미진중함시방 一微塵中含十方)”,
“찰나의 시간이 곧 무량겁의 세월이다.(일념즉시무량겁 一念卽是無量劫)”
라고 하였다.

지혜는 이런 것이다.
우리의 몸에서 무아를 보고, 미세한 티끌 속에서 우주를 보며,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는 것이 지혜이다.
무아를 보면 아집이 사라진다. 아집이 사라지면 욕망이 사라지고
욕망이 사라지면 분노가 사라진다.
이렇게 되면 자신에 대한 집착과 욕망과 분노의 굴레에서
고뇌하던 삶은 안락과 자비로 바뀌게 된다.
또한 작은 것에서도 큰 것을 보고 찰나의 순간에서도 긴 억겁의
시간을 볼 때 삶과 죽음의 과정에서 느끼는 신체적 사회적 고뇌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악몽의 고통에 괴롭던 사람은 꿈에서 깨어나면 고통이 모두 없어지듯이
나고 죽음의 진실과 세계현상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 무지(무명無明)에서
비롯된 고통은 지혜로 진실을 볼 때 고통은 안락으로 바뀌게 된다.
안락은 지혜로 얻는 만족이다.
지혜로 얻는 만족에는 조건이 없다.
조건 없는 만족이 진실한 만족이다.
만족에 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불만족을 정당화하는 논리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지혜로 얻는 만족은 자기의 만족에 집착하지 않는다.
아직까지 고뇌의 짐을 지고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려고 한다.
이것은 지혜의 자연스런 행위이며 과거 자신의 경험을 비추어 멈출 수
없는 동기가 된다.
가난하던 사람이 부자가 되면 가난한 사람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지혜의 공덕으로 실행되는 자비는 역시 조건이 없다.
물이 스스로 흐르는 것처럼, 태양이 스스로 어둠을 밝히는 것처럼
어떤 불안함도 없이 오직 실천할 뿐이다.
기대와 절망에 동요되는 감정이 없다.
자신의 만족으로 실천하는 행위이다.
자비는 고뇌의 어둠을 밝히는 광명이다.
자비광명으로 사회를 평화롭고 안락하게 할 수 있다.


-소쩍새마을 신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