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9-07-10 16:47
[경전공부방] [선요] 선요 15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9,829  

전등록 제8권에는 “금우 화상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금우 화상은 당나라때 아주 독특한 스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2-30년간 공양주가 되어서 항상 공양 준비를 하고 손수 밥통을 들고
선당(禪堂)에 들어 나르고 승당 앞에서 손벽을 치며
“보살님들 어서 공양하러 나오세요”. 하고 춤을 추며 주걱을 다가닥 치면서
다녔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금우화상에 몇세에 출가하셨는지는 몰라도 공양주한다는 것은
어린 나이에는 공양주 보통 못하고 적어도 20세가 넘어서 공양주 할 수 있는데
상당히 오랫동안 늙은 후에도 공양주를 했다고 봐야 됩니다.

무문관 13칙에 덕산의 제자 설봉도 대중의 식사를 준비하는 공양주로서 수행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하여간 금우화상은 평생 동안 대중을 위해서 공양을 짓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그럼 스님들 공양을 짓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
사실은 부처님한테 올리는 공양 다음으로는 살아있는 현신으로 존재하는
수행자들이지요? 수행자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한다는 것은 그것이 상당히
중요한 일이지요. 어느 분이 성인이 될지 모르니까.

그러나 선방에 있는 모든 스님들이 옛선사 스님들이 말씀하시기를 모두다
성인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뭐 특별히 깨닫고 한 사람만 성인이 아니라
선방에 들어 앉아 있는 대중은 모두 다 성인이다. 그런 얘기지요.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재식(齋食)이라고 하지요,
불교에서는 49제라 안하고 49재라 하지요?
또 미타재일, 지장재일,관음재일, 재일이라고 하는데,
재라는 것은 정재(淨齋)라는 뜻이 있지요? 깨끗히 한다.
그러면 깨끗히 한다는 것은 계율수행을 깨끗히 한다는 얘기도 됩니다.
계정혜를 잘 닦는다 그런 얘기지요.

또 재식이라는 것은 사시(巳時)에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시라고 하는 것은 오전 11시쯤인데
부처님께서 공양하시는 시간이지요.
옛날에는 승려는 하루에 한끼니 식사를 했습니다.

아침에 공양은 어린아이들, 사미승들이지요? 20세가 안되어서
많이 배가 고프고 먹고 싶어할 때, 이런 어린 아이들에게는 아침에 죽을
먹게 하고, 또 노인하고, 아이들은 죽을 먹게 했다고 합니다.
경전에 나오지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스님들은 하루에 한끼니 먹는데
아침(朝)은 제천(諸天)의 선신(善神)이 식사하는 시간이고
낮에 재식 즉 사시에는 삼세제불이 식사하는 공양시간이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스님들은 사실은 저녁 공양은 안하는 것이지요?

유교경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는데.
“그대들 비구들은 모든 음식을 받아먹을 때에 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좋은 음식이나, 나쁜 음식이나 늘리거나 줄이려고 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
약간의 음식으로 몸을 유지하고 배고픔과 갈증을 없애도록 하라.
마치 벌이 꽃에서 단 꿀만을 채취하고
꽃과 향기를 손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과 같이 하라.”
이것이 출가승이 공양할 때 갖는 대한 마음가짐이라고 했습니다.

스님들이 공양하는 것은 이런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공양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사십이장경 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머리와 수염을 깎고 사문이 되어 도법(道法)을 배우는 자는
재산을 버리고 걸식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아무리 재산이 많다고 하더라도 걸식을
해야 된다는 얘기지요.
하루 한 끼의 식사(日中一食)로 나무 밑에서 하룻밤을 쉬고(樹下一宿) 이틀을 같은
곳에서 묵지 말라” 부처님께서 그러셨어요.

중국 선원에서는 아침에 죽을 먹고, 점심공양(齋食)은 정식이라 했습니다.
점심공양하는 것은 정식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한정식 그러지요?
그러니까 알고보면 바르게 나오는 식사를 정식(定食)이라고 하는데
요즈음 우리들이 쓰고 있는 정식이라는 말도 다 불교계에서 나왔지요?

그리고는 저녁은 약석(藥石)이라고 하는데 선방에서는 스님들이 원래
일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도 그렇습니다
특히 중국 같은데는 재난이 많이 일어나지요. 전쟁이..
그래서 스님들이 산속에서 탁발을 못나가니까 산에서 밭도 일구고 논도 일구고 해서
벼도 심고 보리도 심고 밀도 심고 그러지요?
이렇게 일을 하다보니까 저녁에는 자연이 배가 고프지요
저녁은 못 먹으니까 배가 아프고 배가 고파서 돌을 불에 따뜻하게 달구어서
그 돌을 배에 문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약석(藥石)이라고 해요.

스님들이 저녁을 조금 먹지요?
저녁을 많이 먹는 것은 안됩니다.
저녁 공양을 일러서 약석이라고 그럽니다.

스님들이 먹는 아침은 원래는 없는 것이고
사미승과 노인들은 죽을 먹고 사시만 먹는 것인데
저녁을 먹는다면 그것은 약석으로 보면 됩니다.

자 본문 공부 한번 해 볼까요?

개당보설 기일

一味只是擧(일미지시거)호대 擧時(거시)엔 則有(즉유)하고 不擧(불거)엔 便無(변무)하며 設要起疑(설요기의)라도 亦無下手處(역무하수처)하며

무슨 말인고하면
일미지시거하대
한결같이 다만 화두를 들대,
일미라는 것은 보통 선에서는 “맛이 일미야,” 그런 말을 쓰는데
일미라는 것은 맛이 좋다고 할 때, 일미라는 말을 쓰는데 선가에서 나온 말이예요.
일미라는 것은 한결같은 맛이라는 것은 “화두가 잘 들린다 그런 뜻입니다.“

한결 같이 다만 화두를 들때,
거시엔, 들 때에는

즉유하고 , 곧 있고

불거엔
화두를 들지 않을 때에는,화두를 잘 챙기지 않을 때 말이지요?

변무하며
문득 없어지며

설요기의라도
설사 의심을 종요로이 일으켜 들더라도,
종요로이라는 말을 제가 일부러 중요이라고 안쓰고 종요로이라는 말을 썼는데
요즈음은 이런 말들일 잘 안써요. 종요로이 이 순수하고 좋은 말들인데
중요하다는 말하고 요긴하다는 말하고 종요로이라는 말하고 비슷비슷한데
조금 의미와 느낌이 다른 것입니다.
종요로이 일으키다. 긴요이 일으키다는 말이 좀 그렇지요?
이심을 종요로이 일으키다 그런 얘기인데

역무하수처하면
또한 손을 놓으면 그런 얘기지요?
문득 화두를 들다가, 설사 화두를 잘 들었다고 하더라도
화수를 놓으면 그런 얘기예요.

設使下得手 疑得去(설사하득수 의득거)라도
일으켜 들더라도 놓으면 사라지고
설사 화두를 들어 겨우 의심하여 가더라도
의득거는 의심하여 가다 그런 얘기지요.

只頃刻間(지경각간)이니
잠시뿐이다 이 말이지요.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잠시라는 얘기지요.
잠시뿐이니

又未免被昏散(우미면피혼산)의 打作兩橛(타작양궐)이니라.
이 궐자는 말뚝 궐자인데 달아난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혼침과 산란함 둘을 깨어 버려야 하느니라 그런 얘기예요.
혼침한 것, 참선을 하는데 마음이 혼침한 것이어요.
어두컴컴하고 잠도 아니고 이상한테 빠져 있다 이말이지요.
그리고 산란해, 그러니까 타작양궐이니라
둘을 깨서 달아나게 해야 된다 그런 뜻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말로는 둘을 깨버린다. 그런 말로 말이 끝난 것입니다.
참선은 이와 같이 한다 이말이지요?

그러니까 여러분들께서 무 자 화두를 들던, 시삼마를 들던, 화두를 들 때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이 뭣고를 들면 제일 편할 것입니다.

지금 이 공부를 하는 나는 뭔가?
누가 듣는가 이런 것을 살피는 것도 즉 화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 다음 구절 볼까요?

於是(어시)에 空費許多光陰(공비허다광음)하며 空喫許多生受(공끽허다생수)호대
어시에는 그러하매, 그럴 때 그런 얘기지요.
공허로이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공비허다광음, 광음이라는 것은 시간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에야 시계가 있어서 시간을 보지만
옛날에는 빛과 그림자를 보고 아침인지 점심인지 저녁 때인지 알지요?
해그림자를 보면 지금 몇시쯤 됐는지 압니다.
그래서 광음을 시간으로 얘기합니다.
많은 시간을 헛되이 허비하며

공끽허다생수하대
헛되이 생을 많이 받아가면서
끽은 잡을끽, 먹을끽, 그런 것인데
생을 먹는다는 것은 자구 여러생을 받는다는 뜻이지요.
수생한다는 뜻입니다.
이 몸을 받아나고 또 받아나고,

여러분들 자신이 몇 번이나 이 세상을 받아왔는지 아십니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略無些子進趣(약무사자진취)일러니라
공부하더라도 조금도 진전이 없음이러라, 없더라 그런 얘기지요.
간략히 조금도 진전이 없더라,
간략히 하려고 해도, 조금하려고 하더라도, 전연 진전이 없다.
뭐 많이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조금 하려고 해도 전혀 진전이 없다.

一歸何處(일귀하처)는 화두지요?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만겁귀일 일귀하처지요? 만가지가 하나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그러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 그런 얘기지요.

却與無字(각여무자)로
일귀하처는 무자 화두와 달리 각여무자 로 그랬지요?
무자와 달리 각여라는 것은 달리

不同(부동)하고
갖지 아니하고

且是疑情(차시의정)이 易發(역발)이라.
무자와 갖지 않고 의심덩어리가 쉽게 생기니라.
이 고봉화상께서는 무 자 화두를 들지 않고 만법귀일 일귀하처를 들었지요?

一擧便有(일거변유)하고
또 들기도 쉽고,
일거변유하고, 한번 들면 잘 들리고 그런 뜻이지요.

不待返覆思惟計較作意(부대반복사유계교작의)라도 纔有疑情(재유의정)이면 稍稍成片(초초성편)하야, 그랬어요.

되풀이 하야 사유하고
그러니까 되풀이하고 사유하고 되풀이하고 사유하고, 사유하고 또 사유하고
그러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화두를 자꾸 되씹어서 지금 내가 만법귀일 일귀하처, 일귀하처는 어디로
돌아가나, 일귀하처 일귀하처를 자꾸 되풀이하는 그런 얘기입니다.

부대반복사유계교작의 라도
사유하고 계략하고 뜻을 모으지 않더라도

재유의정이면
잠시 의정이 있으면, 의심할 뜻의 화두를 들라고 한다면 그런 얘기지요?

초초성편하야
점점이루어져서
조금씩 그런 뜻도 되고,
벼줄기초 자친데 벼줄기가 뭐냐하면 촘촘히 논에 착착 서 있지요?
그런 뜻입니다.
잘 들어서, 잘 이루어져서

便無能爲之心(변무능위지심)이라.
문득 화두 들려는 마음이 없어진다.
화두 들려는 마음을 갖지 않더라도 화두가 들린다. 그런 얘기지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느냐
만법귀일 일귀하처는 무 자 화두와 달라서 화두를 들면 저절로 잘 들린다.
그런 말씀이 되지요.

다음 구절을 보겠습니다.

旣無能爲之心(기무능위지심)이니
이미 화두를 들려는 마음이 없으니
지금까지 화두가 잘 들리니 오히려 화두를 들려는 마음을 낼 필요가 없겠지요
오히려 낸다는 것이 망상이지요.

所思卽忘(소사즉망)하야
한 생각을 곧 잊고

여러분들 한문이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 있습니다.
한문 어렵다 생각하실 것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은 쉬운 것은 하나도 없지만 한문이 궂이 어려우면 한글만 보시고
이해하셔도 상관없습니다.
한문으로 되어 있는 원전이니까 원전 놓고 공부 한번 해보는 것이어요.

致使萬緣(치사만연)으로
이를치와 하여금사자인데
만가지 인연으로 이르도록 하여금 그런 말인데 그러면 말이 길어지고 이상하거든요
그러니까 일체 반연으로, 일체 만가지 인연으로, 반연이나 인연이라 같은 소리지요.
하여금

不息而自息(부식이자식)하며
쉬지 않으려해도 스스로 쉬어져요.
그러니까 만법귀일 일귀하처를 들면 궂이 들려고 안해도 잘 들리고
혼침도 안생기고 일체 반연들을 떡 잊고서 이런 반연들을 쉴려고 안해도 쉬어진다.
그런 얘기지요.

六窓(육창)으로 不靜而自靜(부정이자정)하야
여기서 6개 창으로 , 여섯가지 창이라는 것은 육식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안이비설신의,를 육창이라고 했어요. 여섯가지 창이지요
마치 문에 창문이 나 있는 것처럼, 창문이 나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시끄럽지요? 창문이 하나도 시끄러운데 온갖 창문이 여섯 개나 달려 있으니까
얼마나 시끄럽겠습니까? 밖에 소리가.

그래서 육식으로 하여금 고요히 하려고 하지 아니하여도 고요해져서
부정이 자정해서

不犯纖塵(불범섬진)하고
섬진도 범하지 아니하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그런 얘기입니다.
섬진이라는 것은 아주 가늘 섬자이고 티끌 진자인데
아주 가는 티끌이라는 것은 자그마한 번뇌도 그런 얘기지요
조그마한 번뇌도 일으키지 않고

頓入無心三昧(돈입무심삼매)호라
몰록 단박에 그런 뜻이지요?
요즈음 한국에서는 단박에 그러는데 한문을 새길 때는 몰록 그럽니다.
몰록이라는 말이 순수한 우리말인데
몰록, 나도 모르게 그런 뜻이 더 가깝습니다. 단박에 보다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뜻을 더 많이 가지고 있지요.

그러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심삼매 들어간다.
단박에 무심삼매에 들게 하리라.

忽遇喫粥喫飯處(호우끽죽끽반처)하야
홀연히 죽을 먹고 밥 먹는 자리에 처해서
그런 곳을 만나서 그런 얘기지요.
홀연이라는 말은 사실상 필요 없는데
아침에 죽을 먹는다던가, 점심에 밥을 먹는다던가
공양할 때를 말하는 것이지요.

管取向鉢盂邊(관취향발우변)하고 摸着匙筯(모착시저)에도
홀연이 밥을 먹고 수저를 놀릴 때에도 독속에 든 자라가,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不怕破甕中走却鼈(불박파옹중주각별)이니
독속에 든 자라가 도망갈까 두려워하지 않음이니 그런 얘기지요.
독속에 자라를 하나 가두어 놨는데 독속에 자라가 도망갈 리가 없지요?
도망가지 못하지요? 독에 갇혀있으니까? 독이 매끄러워서 못 도망갑니다.

此是已驗之方(차시이험지방)이라
독속에 들어감을 두려워하지 않음이니 이것은 증험된 방법이다.
이미 내가 공부를 해 보니 그렇더라 그 말이지요.

決不相賺(괘불상잠)이니라
결코 속이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들을 속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얘기지요.
괘불상잠이니라, 절대 너희들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如有一句(여유일구)라도
만약 일구라도 사람을 속이는 것이 있다면

誑惑諸人(광혹제인)이면 自招永墮拔舌犁耕(자초영타발설리경)하리다 .
나 스스로 영원히 발설지옥에 떨어지지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고봉화상이 말씀하시기를
이와같이 만법귀일 일귀하처 삼매을 잘 들면
모든 반연을 쉴려고 안해도 저절로 쉬어지고
육식을 깨끗이 안하려해도 저절로 고요해지고
또 자그마한 번뇌도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몰록 삼매에 들어가서
밥을 먹으나 죽을 먹으나 앉으나 서나
어느때라도 전연 관계없이 잘 들린다.

그래서 마치 독속에 든 자라와 같아서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
만약에 이것이 거짓말이나면 내가 영원히 발설지옥(拔舌地獄)이 떨어지리라.
말을 잘못했으니 발석지옥이 떨어진다는 얘기지요?

그러니까 고봉화상께서는 이 화두 드는 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잘 밝힌분으로도
유명합니다.

여러분들께서 혹시 화두를 드시는 분이 있으면
잘 안들렸으면 만법귀일 일귀하처를 들어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열심히 한번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