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9-07-10 15:57
[경전공부방] [선요] 선요 12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20,217  

어느날 한 납자하고 지눌 스님과 한 대담이 있는데
그 제목을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붙여 놨습니다.

어느날 한 납자가 큰 스님을 찾아 뵙고
납자 :상상(上上)의 뛰어난 사람은 들으면 쉽게 알지만 중하(中下)근기의 
어떤 그런 사람들이 의혹이 없지 않을 것이니, 방편을 말씀해 주십시요. 
진리에 대한 방편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지눌스님 보조국사이지요.
지눌 스님 :도는 알고 모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어리석어 깨닫기를
기다리니 그 마음을 버리고 내 말을 잘 들어라.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으므로 .
법이라고 하는 것도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다고 했어요.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번뇌 망상은 본래 고요하고, 번뇌라든가 망상도 원래 고요한 것인데,
원래 없는 것이지요. 고요할 뿐만 아니라.
그런데 그 원래 없는 것을 가지고 우리가 거기에 메여서 시끄럽게 산다 이 말이지요.

티끌 세상은(진세) 본래 공한 것이다.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에 신령스러운 앎(靈知)이 어둡지 않다.
곧 내가 가지고 있는 신령스러움은 항상 밝다 그런 얘기겠지요?

그러므로 공적(空寂)하고 영지한 마음이 바로 그대의 본래 면목(本來面目)이며,
또한 삼세의 부처님과 역대 조사와 천하의 선지식이 은밀히 서로 전한 법인(法印)이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나가 다 똑같이, 더 잘나거나 못난 것이 아니라 똑같이 가지고
있는 영지한 그 마음이 깃들여 있다. 내 안에 깃들여 있다는 이 말이지요.

그는 신령스러워서 모든 것을 꿰뚤어 보고 모든 것을 다 밝하지만
그것을 모르면 중생이라고 그러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이 마음만 깨달으면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부처의 경지를 올라
걸음마다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를 뛰어 넘고 집에 돌아가 단박 의심을 끊게 된다.

집에 돌아 온다는 것은 밖에 순찰 나갔다 집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본 마음 원래의 근본 자리겠지요?

그리하여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고 자비와 지혜가 서로 도와 자리(自利)이타(利他)한다.
나도 이롭고 다른이도 이롭게 한다. 이렇게 자세히 설명을 하셨어요.

납자:  제 분수에 따르면 어떤 것이 공적 영지의 마음입니까?
그래도 못 알아들도 제 분수에 따르면 어떤 것이 공적 영지의 마음입니까?

지눌:  그대가 지금 내게 묻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공적 영지의 마음인데,
어째서 돌이켜보지 않고 밖으로만 찾는가. 그렇게 되 묻습니다.

내 이제 그대에 분수에 따라 본심을 가리켜 깨닫게 할테니
그대는 마음을 비우고 잘 들어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고봉화상의 선요의 선의 중요성 배우는데
배우면서도 밖으로 절대로 찾지 말라는 말씀으로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이어요.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도록 보고 듣고 웃고 말하고 성내고 기뻐하고, 옳고 그른
온갖 행위를 무엇이 그렇게 하는지 어디 한번 말해 보아라.
만약 이 육신이 그렇게 한다면, 사람이 일단 죽게 되면 몸은 아직도 허물어지지
않았는데 어째서 귀는 들을 수 없고, 코는 냄새를 맡을 수 없으며, 혀는 말하지 못하고,
몸은 움직이지 못하며, 손은 잡지 못하고, 발은 걷지를 못하는가.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인가 하면 이 몸이 움직이고 이 몸이 다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지요.
그래서 이 마음이 바로 영지다 그런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보고 듣고 움직이는 것은 그대의 본심이지 육신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지금 이 법회에 참석해서 법문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도 육신이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듣고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본문 보겠습니다

禪要 開堂普說 其一 [4]

山僧(산승)이 昔年(석년)에 在雙徑(재쌍경)이라가 歸堂未及一月(귀당미급일월)하야 ,
산승이라고 했을 때는 스님들이 자신을 가르켜서 산승이라고 그럽니다.
승(僧)이 그러면 다른 스님을 말하고 산승하면 자신을 가르킬 때가 더 많지요.
때로는 山 자를 써 놓고 이 山자를 스님으로 읽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산승이 옛, 석년이라는 것은 옛석이지요.
옛날에 쌍경사에 있다가 그런 얘기지요.
귀당미급일월하야 선귀당이라고 해서 선방입니다.
선방에 돌아와서 채 한달이 안되어, 선방이라면 꼭 참선하는데만이 아니고
쌍경사가 주로 선방을 위주로 수행하는 도량이니까 쌍경사 전체를 일컬은
얘기이기도 하고 당신이 머무는 곳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忽於睡中(홀어수중)에 疑着萬法歸一一歸何處(의착반법귀일일귀하처)니라.
홀연히 잠결에 만법이 일귀하처에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는
화두가 의심이 났다 그런 얘기지요.
의착, 의심이 났다 “만번귀일, 일귀하처”는 화두입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그런데 만법이라고 했을 때 만법이 뭐지요?
일체 모든 삼라만상 전체를 다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 삼라만상이 펼쳐져 있는 그 무수히 많은 것들이 결국 돌아가는 것은 하나다.
한 곳이다 그런 얘기지요.
그 한 곳인데 그 하나는 그러면 어디로 가는 것이냐? 이것이 화두입니다.

自此(자차)로 疑情(의정)이 頓發(돈발)하야,
이로부터 의심 덩어리가 몰록 발해서, 몰록이라고 하는 것인데
의심 덩어리가 나서 그런 얘기지요. 의심 덩어리가 일어나서,

廢寢忘餐(폐침망찬)하며,
잠자는 것도 잊고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며, 그런 얘기입니다

東西不辨(동서불변)하고,
동서남북도 가리지 못하고

晝夜不分(주야불분)이라.
낮인지 밤인지도 불간하지 못함이니라.

참선을 해도 아마 이 정도는 해야 의심을 딱 가지고 공부를 해야
공부를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開單展鉢(개단전발)과 屙屎放尿(아시방뇨)와
至於一動一靜 一語一黙(지어일동일정 일어일묵)
이
總只是箇一歸何處(총지시개일귀하처)
오,

개단전발이라는 것은 바루를 펴는 것을 개단전발이라고 그랬어요
바루를 펴고, 스님들이 공양을 하시려면 바루가 4짝입니다

하나는 어시밥그릇해서 밥을 담는 그릇이고 제일 큰 그릇입니다.
이 밥을 담는 그릇에는 비벼 먹거나 달리 어떤 것으로도 쓸 수 없습니다.
오직 밥만 담아서 밥만 떠 먹어야 되어요. 그렇게 사용하고,
왜냐하면 어딜 다니다가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는데 불기가 없을 경우에는
어시밥그릇을 꺼내서 부처님께 불기로 사용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것은 맘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큰 것이 국그릇,
세 번째 큰 그릇이 물그릇입니다.
네 번째 제일 작은 그릇 그것이 반찬 그릇 그렇습니다. 전발이 네 개지요.
바루는 4짝 그러지요?

아시방뇨와, 똥 놓고 오줌 놓는 것과
지어일동일정이,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는 것과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다만 이것이 다 어디로 돌아감이요. 일귀하처요 그랬어요.
다 이것이 어디로 돌아가는가?

更無絲毫異念(갱무사호이념)이며
다시 여기는 터럭끝만큼도 다른 생각을 갖지 아니하며, 그랬어요

亦要起絲毫異念(역요기사호리념)해도
다른 생각을 일으키지도 않고 도저히 다른 생각을 일으킬래야 또한
일으켜지지도 않아요. 일어나지도 않아요.

了不可得(요불가득)호미,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요.

正如釘釘膠粘(정여정정교점)하야 撼搖不動9가묘부동)이라.
이것은 바로 뭐와 같으냐?
정정이라는 것은 못이지요?, 못과 못을 딱 박아가지고 이것을 아교를 딱 붙여서
박은 것과 같아서 가묘부동이라, 흔들어도 절대로 흔들리지 아니함이라.
요지부동이라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참선하는 스님들이 대부분이 이런 요지부동한 참선을 잘하면
그 스님을 정진을 잘한다고 그래요.

강설에서 주를 한번 볼까요?

[강설] 萬法歸一 一歸何處: 벽암록(碧巖錄) 제 45즉(則)에 한 스님이
조주 선사에 묻기를 만법귀일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오 하니

조주선사 말씀 하시길
내가 청주에 살 때(我在靑州)
베 장삼을 하나 지었는데(作一領布衫) 무게가 7근이더라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청주포삼이 화두입니다.
그럼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만법귀일귀하처에대한 소견을 물은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입니까 하고 물었단 말이지요.

이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이렇게 물었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는 엉뚱한 말 같지요?
청주가 베가 잘 지었는가 봐요.

내가 베 장삼을 하나 지었는데 근을 달아보니 7근이더라.
7근 일 수도 있고, 8근 일수도 있고, 다 제값이지요.

趙州: 조주선사(778-897)는 임제종의 남전(南泉)보원(普願)선사의
법제자이지요.
조주(趙州)종심(從諗)이라 흔히 부르는데 종심(從諗)은
법명이고, 당나라 때 조주 사람이어서 조주라 부릅니다.
대개 옛날 스님들은 그 스님이 계신 곳을 따라서 이름을 부르지요.

우리가 서산 대사하면 서산이 법명인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묘향산의 다른 이름이 서산입니다. 그래서 서산대사라고 그래요.

어려서 조주(趙州)의 호통원(扈通院)에 들어 갔으나 수계하지 않고
지양에 남전을 찾아 갔으나 남전은 마침 누어 있으면서 남전이 “어디에서
왔는고?“ 하고 물었습니다.
남전선사가 선방에서 반쯤 누워서 한쪽 팔로 머리를 딱 괴고
수좌가 왔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어디서 왔는고?” 하니까

조주가 말하길 瑞祥院(절 선원이지요)에서 왔습니다 하니
“남전 瑞祥은 보았는가” 하고 물으니까 ‘서상은 보지 못하고,
서상에서 왔다니까, 남전 서상(상서스러운 상), 서상원이라고 했으니까
이 곳에서 남전 서상은 나의 서상은 보지 못했느냐고 물은 것이어요.
보지 못했는가 물으니까
“서상은 보지 못하고 누워 있는 부처님은 보았습니다.” 하니까
스님이 벌떡 일어났어요.
아 이놈 봐라 싶어 가지고...

그럼 “네가 有主 사미냐? 無主 사미냐?” 하고 물으니,
그러니까 스승을 정한 사미냐 그냥 돌아다니는 사미냐 그런 말이지요

“유주(有主) 사미(沙彌)입니다” 하고 대답했어요.
“주인이 있는 사미입니다“ 스승이 있습니다 했어요.
선사가 그러면 “주인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니까
조주가 말하기를 “동지달이 매우 춥사온데 기 체후(體候) 만복(萬福) 하시옵니까?’
하고 기특하게 스님한테 절을 꾸벅한단 말이지요.
무슨 말이지요? 나는 이미 당신의 제자입니다.
당신이 나의 주인입니다 그렇게 답을 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선사가 기특하게 여겨 입실(入室)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숭악(崇岳)의 유리단(琉璃壇)에 가서 계(戒)를 받고 남전(南泉)에 돌아 와
그리고 동원(東院)에서 설법하니 크게 법을 떨쳤다고 그러지요.

조주 스님에 대해서는 조주록 있지요?
무비 스님이 조주록을 좋아해가지고 조주 법어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정말 책을 잘 쓰신 것이 하나 있어요.

여러분들 기회 되시면 불교서적 센타에 가셔서 스님이 쓰신 책을 한 번
사 보시기 바랍니다.
한번 읽으면 크게 향상 될 것입니다.

☆조주감파(趙州勘婆): 오대산 가는 길목에 어느 노파가 항상 길에서 장사를 하는데
오대산 가는 스님들이 길을 물으면 항상 “똑바로 가시오” 그럽니다.

누구든지 오대산 어디로 갑니까? 그러면 이 노파가 떡을 팔다가
“똑바로 가시오”

그리고는 스님이 길을 가면 “저만한 스님이 또 저렇게 가시네” 하고 그랬답니다.

재미있는 말이지요? 스님이 길을 묻고 가면은
“저만한 스님이 또 저렇게 가시네” 참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어떻게 설명을 해 드릴까요?
여러분들 스스로 이것은 느끼셔야 될 것 같아요.

“저만한 스님이 또 저렇게 가네”

여러분들이 “지금 이만한 분들이 지금 법문 듣습니다”

어느 납자가 조주 선사에게 그 노파 이야기를 했는데 조주 선사가 그럼 내가 가서
그 늙은이에게 따져 봐야 겠다. 하시고는 그 이튼날 가서 그 노파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그 노파는 예전처럼 똑같이 길을 가르쳐 주었는데
뭐라고 했냐하면 “똑바로 가시오” 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조주 스님은 돌아 와서 내가 가서 따지고 왔다 왔다면서.
하하하... 웃었다는 말이지요.

옛 조사스님들은 사실상 우리 일반인들이 보면 따진 것이 아니지요?
길만 묻고서 똑바로 가시오 하니까
당신도 그렇게 하고서 돌아와서는“내가 길을 가르쳐 준 노파하고 단단히
따지고 왔다“ 그러면서 ”하하하 “웃었다 이 말이지요.

여러분들 그 점도 잘 한번 참구하시기 바랍니다.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아주 유명한 화두입니다.
어느날 조주 선사에게 선승이 묻길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무(無)” 하셨다 말입니다. 조주 무자 화두가 유명합니다.

선승이 다시 묻길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개는 불성이 없다고
하십니까 하니 스님은 또 유 했어요.유 했다는 말은 쓰지 않았습니다만
“그는 업식성(業識性)이 있기 때문이니라” 업식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니라.
 또 어떤 스님이 와서 묻길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이번에는 ‘유(有)’ 하였습니다.
후로 有라는 화두는 없지만 '無'자 화두는 있습니다.

다음에는
☆조주구화(趙州救火):조주스님이 불을 구하다 라는 것인데
조주선사가 어느날 황벽(黃檗)스님이 오는 걸 보고는 얼른 법당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는 법당 안의 촛대의 불을 잡고  “불이야 불이야”  그랬지요?
부처님을 우리가 뭐라고 하지요? 佛 자를 쓰고 불이라고 하지요? 발음만 같지요?
뜻은 다르지만 불이야 불이야 하니까

황벽이 조주 선사의 멱살을 잡고 “어디? 어디?” 어디가 불이냐 이 말이지요?
이때 조주가 말하길 “도적이 지나간 뒤에 활줄을 당기는군” 다 끝났는데
활줄을 당겨서 뭐하느냐? 그렇게 대답했단 이 말이지요?

그 다음에
☆조주나복(趙州蘿蔔): 나복이라는 것은 무를 얘기하는 것인데요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님께서 친히 남전 선사를 친견하셨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물으니까

선사가 답하시길 ‘진주(鎭州)에 큰 무우가 난다지?’ 하였습니다. 엉뚱한 말 같지요?
벽암록 제 31則 에 있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조주 문사(趙州問死): 조주 문사는 조주 선사가 투자(投子)에게 묻기를
“크게 죽은 사람이 도리어 산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니 투자 선사가 말하길
“밤 길을 조심하고 내일 오라”는데서 나온 화두지요.

조주 문사 크게 죽은 사람이 도리어 산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크게 죽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 크게 죽은 사람일까요?
죽는 것도 작게 죽고 크게 죽는 것도 있습니까?

정말 나를 죽이면, 정말 내가 죽으면 살아 납니다.
계속 내가 살려고 하고 무엇인가 할려고 하고
내것을 무엇인가 만들려고 하니까 결국 우리가 살지 못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조주 백수자(趙州柏樹子): 이것도 화두지요.
어떤 스님이 조주 선사를 찾아 와서
앉지도 않고 조주 선사에게 묻길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하니
조사서래의 그러지요?
조주선사가 말씀하시길
“뜰앞의 잣나무니라.  정전(庭前)백수자(柏樹子)니라“ 그랬어요.
뜻 앞에 서 있는 잣 나무가 부처님 법이라 이말이어요.
무문관 37문에 있습니다.

☆조주사문(趙州四門): 조주의 네가지 문,
어떤 스님이 조주 선사를 찾아 와서 묻길
“어느곳이 조주입니까” 하니 조주가 지역 이름이라고 했지요?
조주 선사님을 찾아와 “어느곳이 조주입니까?”
그러니까 “동문(東門) 서문(西門) 남문(南門) 북문(北門) 이니라”했는데
 벽암록 제 9則에 있는 말씀이지요.

조주라고 하는 동네가 어떻게 생겼는가 하면
동문도 있고 서문도 있고 남문도 있고 북문도 있다 그런 얘기예요.

☆조주삼전어(趙州三轉語): 어느날 조주 선사가 상당(上堂)하여 설법을 하시는데
이 말씀 가운데
“금불(金佛)은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금이 용광로 지나가면 다 녹아 보리겠지요?)
목불(木佛)은 불을 건너지 못하고 (나무가 불속을 지나면 다 타버릴 것이고)
토불(土佛)은 물을 건너지 못한다“(흙으로 만든 부처님은 물을 지나가다가는
전부다 허물어지고 말 것지요?) 이것을 조주 삼전어라고 그러지요?

벽암록 평창(平唱)에 금불이 용광로를 지나가면 녹고,
목불이 불을 지나가면 타 버리고,
토불이 물에 들어가면 풀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벽암록(碧巖錄)96則에 있는 평창에 있는 말입니다.

평창이라는 것은 거기에 대해서 평해 놓은 얘기지요.

이와같이 조주선사에 대해서는 오늘 밤새도록 얘기해도 다 찬탄하지 못하고
조주선사가 하신 말씀하신 것을 우리들이 무도 다 알려면 그야말로
세월이 좀 많이 흘러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옛선사들의 행적을 이렇게 한번씩 바라보는 것도
큰 공부가 될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내일 뵙도록 하고요 오늘은 마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열심히 이런 좋은 기회에 함께 선공부를 하는 것
정말로 귀중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강의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