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9-07-10 15:53
[경전공부방] [선요] 선요 11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21,526  

과거 옛날에는 다른 나라 황제, 제왕이 한 분만 오신다고 하더라도
나라가 들썩했습니다.
지금은 많은 외국 원수들이 빈번히 다니니까 외국에서 누가 온다고해도
상당히 국민들이 무뎌졌습니다.

나라가 부강하고 강할수록 많은 외빈들이 그 나라를 찾게 되지요.
그래서 미국은 일년내내 100여개국에 가까운 정상들이 워싱턴을 찾습니다.
그만큼 강한 국가라는 것을 알수 있겠지요?

오늘 배울 곳은 선요의 개당보설분의 11번째 그 세 번째 되지요?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한가지 선사들의 말씀들, 가르침을 살펴 보겠습니다.

벽암록 제 55칙에 있는 말씀인데요.
55칙에 보면 도오화상과 점원화상 둘이 나눈 대화가 나옵니다.

어느날 도오화상이 제자 점원과 함께 신도집에 문상을 갔습니다.
문상 가서 도오화상의 제자인 점원이 관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어떻게 보면 이런 행위는 상가집에서는 큰 실례되는 행위가 되겠지요
그러나 한 법을 참구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항상 일념으로 이 뭣고를 참고하는 납자에게는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도오화상이 이때 말했지요.
“살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점원이 말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왜 말할 수 없습니까?”
“빨리 말해 주세요”

도오 화상과 점원 화상 둘이 스승제자간에 절로 돌아오면서 다그칩니다.
“스님 빨리 가르쳐 주세요”
“그래도 난 말 못하겠다” 그러니까 점원이 그럽니다. “그럼 제가 스님을 때리겠습니다.”
“그럼 때려봐라” 그래서 자기 스승을 후려쳤다고 했어요.
이 말들은〈조당집〉제6권, 〈전등록〉제15권 점원장에 나오지요..
도오원지(道吾圓智.)라는 분은 ( 769~835)살으셨니까 8세기말 분이지요.
약산유엄선사의 법을 이은 제자입니다.〈조당집〈전등록〉송고승전〉제11권 등에
이렇게 수록되어 있는데

이 말씀에 도오 화상에게 질문한 “관속의 사람은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물은 것은 어떤 의미 일까요. 육체적인 것으로 볼때는 이미 죽은 것이 분명하지요.
죽은자인데 이미 관속에 들어가 있거늘 제자가 농하는 것처럼
“살았느냐 죽었느냐” 일반인이 보면 농하는 것외에 달리 볼 수가 없겠지요?

그렇지만 참선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한 물건이라고 했는데
이 한 물건이라고 하는 그것이 관속에 있는 그가 그인지?
그럼 관속이 아니고 다른 곳에 있는 것인지?
어디로 떠나가고 있는 것인지? 여러분도 아마 궁금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 번 일러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참구하는 것이 선자들의 본분이지요.
이후로 도오화상이 그랬다고 합니다.
점원이 보고 “만약 자네가 스승인 나를 때렸다고 하는 것이 알려지면
이 절에서 자네가 살아가기가 곤란해질 것일세“ 그래서 점원은 그 절을
떠나서 어느 조그마한 절에 가서 나무하고 부목처럼 살았다고 그래요.

부목처럼 살면서 공부를 하는데

어느날 하루는 관음경을 읽고 있는데 관음경을 읽다보면
“비구의 몸으로 제도를 받을 자에겐 비구의 몸을 나타내어 설한다”는 구절을 읽고,
여기서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비구의 몸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비구의 몸을 받고,
비구니의 몸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비구니의 몸을 얻고
또 청신사의 몸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청신사의 몸을 얻고
또 청신녀의 몸을 구제 받을 사람은 청신녀의 몸을 얻어서 청신녀를 만난다.“

결국 보면 끼리 끼리 만나는 것이지요.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야 제대로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읽고서 곧장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 점원이 다시 절로 찾아와서 하루는 법당에서 삽을 들고 무엇을 찾는 것처럼
이곳저곳 왔다 갔다 그럽니다.

그렇게 시늉을 하니까 이때 석상 화상이, 석상화상도 도오스님의 제자니까
사형사제지간이겠지요. 자기 사형입니다. 석상화상이 사형입니다.
“자네는 도대체 뭐 하는 것인가” 하고 물으니까 “지금 스승님 의 영골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점원이 자기 스승이 열반하신 것을 모르고 지냈어요
이때 석상 화상은 말하길 “이사람아 여기는 거대한 파도가 일렁이는 곳일세”
“어디서 영골을 찾겠단 말인가”.

법당안에서 하는 말이 이곳은 거대한 파도가 일렁이는 곳이다.
즉 천하대지가 온 세상이 파도와 같은 물거품이다.
그런 얘기가 되겠지요.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은 말 그대로 거대한 파도가 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런 세상인줄 모르고 사는 것이 중생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것들을 아는 것이 곧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 본문 볼까요?

旣見自己(기견자기)의 安身立命處(안신입명처)인댄 不妨向者裏(불방향자리)하야 拗折拄杖(요절주장)하고 ,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미 자신의 안신입명처를 보았을진대, 이미 자기의 안신입명처를 보았다.
그랬을 때는 불방향자리, 이러한 곳에 이르러서는 요절주장하고, 주장자를
꺾어버리고, 주장자를 이르러서는 어디에도 방향을 받지 않는다 그런 얘기입니다.
주장자을 꺾어버림에 방해받지 않고,

주장자를 꺾어버림에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은 뭐지요?
주장자라는 것은 주장자를 꺾던지 아니면 윷판자을 꺾던지,아니면
어떤 불구를 꺾는다고 하더라도 전연 걸림이 없다.
깨달았으므로 어디에도 걸림이 없다 이 말입니다.
주장자라고 하는 것은 조사스님들이 설법을 할때 사용하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高掛鉢囊(고괘발낭)하고 三條椽下(삼조연하)와 七尺單前(칠척단전)에
咬無味飯(교무미반)
하며
바랑은 높은 곳에 걸어 놓고, 스님들이 짊어지는 바랑이지요?
옛날에는 스님들만 바랑을 짊어지고 다녔는데 요즈음은 바랑이 유행이 되어서
물론 먹물들은 회색 바랑은 아니지만 학생이나 어른이나 젊으니라 할 것없이
전부다 등에 뭐 하나씩 걸머지고 다니지요? 좋은 것입니다.

바랑을 높은 곳에 걸어 놓고, 스님들은 사실 이 바랑 하나가 전부입니다.
바랑 속에 보면 별 것 다 들어 있지요? 별 것 다 들어 있다고 해서
온 살림이 많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옷 서너벌, 치약 칫솔, 수건 한 장 정도 양말 한두컬레, 가사 장삼, 바루, 그 것입니다.
이 바랑 걸어 놓고 세 개의 서까래 아래서 서까래는 알겠지요?
옛날에 보면 한옥을 지을 때 서까래가 있어야 되겠지요? 연목이라고 그럽니다.
그럼 왜 서까래가 세 개 뿐이냐? 자기가 누워있는 자리 천장을 바라보면
아무리 세어봐도 서까래 세 개 이상을 찾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서까래 세 개와 칠척단전에, 일곱자 단칸방이라는 얘기예요
한 2m 정도 되겠네요. 조그마한 방이지요. 한 두세평정도 된다고 할까요?
3평도 채 안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방에 교무미반하며, 맛이 없는 밥을 씹으며 그런 얘기예요.
씹을교자 이지요. 무미한 밥을 씹으며, 밥을 먹으며 그런 얘기가 되겠지요.

飮不濕羹(음불습갱)하고
국물이 없는 국을 먹고, 그랬어요.
국물 없는 국을 마시고,
그러니까 맛없는 밥을 씹으며 국물없는 국을 마시고,
그러니까 음식이라는 것이 국은 국물도 있고 밥은 맛도 있어야 될 것인데
그렇지 않은 것이지요.

伸脚打眠(신각타면)하야 逍遙度日(소요도일)이라.
두다리 떡 뻗고, 신각타면, 다리를 펴고 그런 얘기지요? 펼신자 인데 편다는 말보다는
뻗는다, 우리는 뻗는다고 하지요.
두다리를 뻗고 타면이라 잠잔다 그런 얘기지요.
잠을 자도 소요도일리라. 잠을 자면서 세월 보냄에 조금도 방해됨이 아님이로다.

처음에 불방향자리 했을 때 불방이라는 말을 여기까지 끌어 내려와야 됩니다.
그래서 한문은 이런 곳에서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한문을 익히는 데에서는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주어 동사가 바로 있는 것이 있고
어떤데는 동사가 저 밑에 나중에 쓰여지는 경우도 있고 우리말과는 사뭇달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는데 전연 어려움이 없다 그런 얘기입니다.

이미 자신의 안신인명처를 보았을진대 이런 곳에 이르러서는 주장자를 꺾어 버리고
바랑은 높은 곳에 걸어 놓고 세 개의 서까래 아래서 일곱자 단칸방에서 맛없는 밥 먹고
국물없는 국물 마시고 두다리 뻗고 잠을 자고 세월을 보내도 조금도 방해롭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 이 말이지요?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바쁘고 바쁠 뿐입니다.

若是奴郞不辨(약시노랑불변)하며
만약 그럴지라도, 만약 그렇긴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얘기지요
종과 상전을 판단 못하고, 만약 그렇더라도 종과 상전을 판단하지 못하고

菽麥不分(숙맥불분)인댄
숙맥을 판단하지 못할 진대는
숙은 콩숙이고 맥은 보리 맥입니다.
콩과 보리를 분간하지 못한다 그런 뜻이지요.
콩하고 보리는 분명히 다른데 그런 것도 분간하지 못한다 그런 얘기입니다.

抑不得已(억부득이)하야 按下雲頭(안하운두)하고
부득이 구름을 갖다가 허공 속을 향해서,
부득이 구름을 잡아다가, 누룰 억자 인데 누룬다는 뜻보다는 잡을 억으로 보면 됩니다.
구름을 잡아다가 안하운두하고,가 무슨 말인가 하면
이 구름을 잡아다가 허공 속을 향해서 그 운두를 향해서 그런 얘기인데,
부득이 구름을 가져다 허공 속을 향해가지고

向虛空裏(향허공리)하여 書 一本上大人(서일본상대인)하야
허공에 상대인을 만들어 본다, 본을 만든다.
이 말은 무슨 말인고하면 사실상 실체가 없는 그런 것을 갖다가
아무리 좋은 화상,대인이라고, 상대인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큰 스님을 말하는 것이어요.

조사스님을 그려 놓는다고 하더라도,
모본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얘기인데,
허공 속에 하나의 본이 되는 상대인을 그려서는 그런 얘기입니다.
글서를 썼지만 그린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敎諸人(교제인)으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依樣畵猫兒去也(의양화묘아거야)리라, 했어요
의양이라는 것은 의지해서, 모본을 의지해서 그런 얘기예요.
고양이를 그려가게 가르치리라. 여기는 고양이 묘자이지요?

왜 고양이를 그려가게 하느냐? 하나의 어떤 화상의 그림을 하나씩 하나씩 그려 놨는데
고양이가 쥐을 잡을 때 아주 골똘이 다른 일체를 생각을 안해요.

제가 한번 언제인가 법당에서 보니까
고양이라는 녀석이 쥐가 한마디 지나가서 벽틈의 조그마한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어요, 쥐가 나올 때까지 약 두시간 동안 그 앞에서 꼼짝도 않고
사람이 오던 가던 아무 생각없어요. 오직 그곳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쥐가 나오니까 날쎄게 쫓아가서 물고 밖으로 나갑니다.

마치 참선하는 사람도 이와같이 고양이처럼,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일체의 어떤 망념을
갖지 않고 그렇게 해야 된다는 그런 뜻으로 이 말을 쓴 것입니다.

다시보면 만약 그럴지라도 종과 상전을 판단 못하며 보리와 콩을 분간 못할진대는
너희들이 아무 뜻을 모르고  내 말을 못 알아 듣는다면, 이렇게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다면, 그런 얘기입니다.

부득이 구름을 갖다가 허공 속을 향해서 하나의 본이 되는 상상 대인을
그려서 허공에다 상대인을 그린다는 그런 얘기예요.
큰 스님을 하나 그려 놓고, 화상을 그려 놓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여기에서 제인이라고 하는 것은 스님들을 얘기하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이라고 했지만, 비구들을 향해서 그런 소리입니다.

모든 비구들로 하여금 의양이라는 것은 모본을 의지해서 고양이를 그려가게 하리라.
그런 뜻으로 이렇게 쓰셨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특히 여러불자들이 선방에 공양을 간다해서 돈을 얼마씩
걷는다던가 아니면 돈이 있는 분들은 선방 공양이라고 해서 선방 공양을 내지요?

요즈음은 사실 선방이 제일 넉넉한 곳입니다.
혹 여러분들이 선방에 가서 공양하는 것도 좋지만, 선방도 물론 해야 됩니다.
강원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은 항상 보면 어려워요. 책 사 보는 것도 어렵고,
밥 못 먹는 절은 없지만 여러 가지 어려운 것이 강원인데
해인사 강원이었던, 통도사 강원이었던, 강원에는 신도님들이 공양을 잘 안해요.

이 한국 불교는 선불교가 되어서인지, 선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참선하는 스님들만
제일이고 강원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을 하찮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강원에서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학문도 많이 해야 이 사회에 나와서
부처님 말씀을 잘 전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