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9-07-10 15:51
[경전공부방] [선요] 선요 10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20,053  

참선하는데 선사들을 보면 선사들의 한 말씀, 거동 하나 그 모두가 선과 관계되고
연계되었다는 것을 아시면 됩니다.

운문 선사 얘기인데요

보통 선사들은 선방에서 주장자나 잡고 계시던가 아니면 평상시에 도량을 거니시다가
어느 납자가 와서 묻습니다. 인사를 드리면 대뜸 묻는 것이 뭐냐하면
“어디에서 왔나?” 그렇게 묻습니다.

하루는 운문 선사한테로 와서 어느 납자가 묻습니다.
“스님 안녕하십니까? 스님을 뵈러 왔습니다.“그러니까 다짜고짜
“어디서 왔나?” 하면서 어디서 왔는고 부터 묻지요.

어디서 왔냐고 해서 예를 들어서 서울서 왔으면 저 서울서 왔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틀렸습니다. 어디서 왔는가 라고 묻는 답속에서 온 고장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고장을 완전히 차치하고 대답해도 답이 틀립니다.

운문 선사를 보면 운문 선사는 당의 말기 스님입니다.
당나라하면 불교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당나라 시대에 중국 불교가 완성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당말 스님인데

운문(雲門) 선사는 소개가 필요없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운문 선사가 제자들을 접하는 솜씨가 뛰어나고 선의 말씀들이 묵직하고
성격도 어떻게 보면 괄괄하고 괴팍하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도 듭니다.

하루는 스님이 법당에서 나오시는데 마침 한 스님이 왔어요.
도반 스님이 오니까 그 스님을 보고 하신 말씀이 내가 이 법당에서
“나가겠는가? 들어가겠는가?” 그렇게 물었답니다.

그러니까 이 스님이 “운문 이애가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구나, 두다리가 부러져야
들어가고 나가는 것이 없지“ 하고 법당문을 너무 세게 닫아서 다리가 부러져서
평생 절름발이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선사들의 행위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앞으로 나가는 것만 있지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별로 없어요.

벽암록 35칙에 보면 앙산이 학인에게도 그런 물음이 있어요
“어디서 왔는가?”이런 물음은 그 선사 뿐만 아니고 모든 선사들이 지금도 대개가
학인들이나 선자(禪子)들이 가면 “어디서 왔는가” 그렇게 묻습니다.

그 한마디에 답을 잘할 수 있으면 선을 좀 많이 닦은 사람 또는 지견이 있다고 보고,
단박에 혼을 빼 놓기도 하고 그를 다는 저울이기도 합니다.

누구라도 이 말에 한번 잘못 걸려들면 여지없이 모두다 갇히게 되고
혼이 내빼고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원오는 “탐간영초(探竿影草)”라고 착어를 했습니다.
탐간영초라고 하는 것은 고기잡기 위해서 메다가,
뭐와 같으냐하면 조루와 같은 것인데,
대나무가지를 엮어서 그늘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기가 그늘지면 잘 들어갑니다.
그늘지게 만들어서 고기가 들어가면 고기를 잡는 것이지요.
그와 같이 이런 유능한 선사들은 (선자) 납자들이 오면 이와같이
탐간영초처럼 해서 그를 낚아챘다 그럽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오직 선사들의 안목을 살펴보고, 지혜도 엿보고
그 근기가 얼마만큼인가를 알아보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래서 물의 깊이를 알기 위해서는 지팡이를 사용하고
사람의 안목과 수행의 척도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일언구(一言句)를 던지는 것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선사들이 한마디와 행동은 모두가 상대방의 안목과 역량을 단번에 알아 버리기 때문에
참선하는 납자들은 조심해야 걸려들지 않습니다.

우리들도 옛날에 선원에 다닐 때 대개는 처음에 선사들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몰라서 쩔쩔매지요? 그러다가 적어도 선방에 3,4년 5,6년 다니게 되면
눈치 챌만큼 다 눈치챕니다. 워낙 안돌아가면 할수 없고,

그래서 좀 돌아갈만하면 선어구, 선어록 같은 것을 선사들이 많이 읽고
그런 것을 외워 놨다가 그것을 가지고 대답을 할 때도 있고
또 자기가 모범 답안을 만들기도 합니다.

지금도 아마 그럴 거예요. 그런 모범답안을 드리밀기도 하지요.
그런데 사실은 어떤 때 모범답안이 자기를 묶어 놓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주 재미있어요.

여러분들도 그렇게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기야 할 기회가 없겠지만

어디(甚摩處)서 왔는가? 라고 하는 질문은 근세에 사셨던 성철스님이나
고암스님도 제가 해인사를 찾아갔더니 “그대는 어서 왔는가” 그래요?
그래서 “저 충청도에서 왔습니다” 하니까 “그래” 그 다음에는 아무말씀 없으셨습니다.

또 수시(垂示)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수시라는 것은 “들어 보이다.”
들어 보이다 라는 뜻인데 선사들이 법문하시는 것을 보통 수시라고 합니다.

수시라고 하는 것은 언구를 떠나서 하는 것을 보통 수시라고 할 수 있지요?
제스쳐 같은 것인데 손을 들어 보인다던가, 불자를 털어 준다던가,

불자(拂子: 원래 사자목털로 마치 털이개처럼 만들었는데 이를 불자라 한다.
여러분들 영정 같은데서 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중생의 번뇌를 털어준다고해서 법상에 앉아서 납자들이나 아니면
불자들이 오면 이렇게 들어가지고 머리를 한번 쓸어 줍니다.
그러면 번뇌가 다 사라진다고 그러지요?

그래서 그 불자를 쓴다던가 하는 것을 수시(垂示)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수수(垂手)란 말도 있어요.
이것은 부모님이 아기를 잘 기르듯이 하는 것인데, 어른이 아이들을 잘 보살피듯이
하는 것을 수수(垂手)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자(垂慈)라고 하는 말도 있어요
이것도 역시 같은 뜻입니다.

여러 선사들이 제자들을 제접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이 운문선사는 아주 남달랐기 때문에 선가에서 많이 남는 그런 인물입니다.
나중에 시간되면 운문선사에 대해서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본문 한번 볼까요?

進云, 此事(차사)는 且止(차지)하고 只如西峰(지여서봉)은 今日(금일)에
十方聚會(시방취회)하야 選佛場開(선불장괘)하시니 畢竟(필경)에 有何祥瑞(유하상서)닛고,
제자가 나가 묻되, 이 일은 차사는 차치하고 차치한다는 말 많이 쓰지요?
일은 차치하고 단지 서봉사에서 다만 여서봉이라는 것은 서봉사에서,
금일 오늘에 시방취회라는 것은 모든 대중들이 모인 것을 말하고,
시방은 알지요? 동서남북 그러면 4방인데 4방에 간방까지 합치면 8방이고 
상방하방을 합치면 시방입니다. 십방이라고 안읽습니다. 시방이라고 읽지요.
시방대중이라는 것은 동서남북에서 모두 모인 여러종류의 대중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여서 선불장괘,부처를 뽑는 도량을 열었으니
필경에 유하상서이고, 마침내 어떤 상서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절에, 서봉사에 스님께서 선불장을 열었으니까
선방을 다 짓고서 부처를 뽑는 도량을 열었으니까 어떤 상서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물은 것이지요.

부처를 뽑는 도량이란 것은 선불장(選佛場)을 말하는데 선불장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건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스님들이 공부하는 선방을 일러 선불장이라고
그럽니다.

예를 들어서 혼자 선을 하는 선방이었던, 열이하는 선방이었던, 백명이 하는 선방이었던
모두 같습니다.

그러니까 선방이라는 것은 모두다 부처를 뽑는 것이다.
더 넓게 보면 이 세상은 부처를 뽑는 도량이라고 볼 수 있어요.

거량에서 부처가 태어나고
부처를 태어나고 조사가 태어나고 보살이 태어나고 하니
묘법 도량이 아니라고 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묘법 도량이 뭐냐 이것이 바로 상서다.

어떤 것이 상서냐고 했으니까 이것이 상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서라고 하는 말을 부첨해서 설명을 드리면
여러분들이 이런 것을 느낌으로 알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법문을 듣는 순간 순간마다 내 생각안에 내 마음안에 상서스러움이
항상 깃들여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부처님이 시방에서 지금도 널리 보광명을 놓는다고 하시거든요. 화엄경에.
광명을 놓는 이유가 뭐냐하면 무진겁래로 올 모든 중생들을 다 구제하기 위함이다
그랬어요. 과거세로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도 항상 광명을 놓고 계신데
우리는 미혹해서 부처님 광명을 느끼지 못하지요?

그래서 미혹이라는 것만 빼고 나면 바로 그것이 광명이다 그랬어요.
이 법문을 듣는 이 순간에도 바로 부처님의 상서가 있기 때문에
법문을 들을 수 있고 고봉 화상의 간절히 모든 제자들을 제접하는
그런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 글귀 한번 볼까요?

師云: 山河大地(산하대지)와 萬像森羅(만상삼라)와 情與無情(정여무정)이
悉皆成佛(실개성불)
이니라.
이 답은 뭐냐하면 선불장을 열었으니까 어떤 상서스러움이 있느냐 하니까
산하대지와 삼라만상, 여기서는 만상삼라라고 했지요? 말을 뒤집었습니다.
만상삼라와 정과 무정이라는 것은 정은 유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정무정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정이여 무정이라는 것은 유정과 무정.
유정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 무정이라는 것은 목숨이 달려 있지 않는 생명.
이런 것들 모두를 얘기하는 것이지요.
산하대지 전체를 다 얘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 성불한다 그랬어요
우리는 누가 특별한 법문만 듣고 부처님한테만 귀의해야 성불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도 성불하고, 어디가도 성불하고 이 세상에 모든 일체는 모두다 성불한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進云:  旣皆成佛(기개성불)인댄 因甚(인심)하야 學人(학인)은 不成佛(불성불)이닛고.
이미 다 성불했을진대 어찌해서 학인은 성불하지 못했습니까? 그렇게 묻는 것이어요.
여러분 같으면 어찌 물었겠습니까? 똑같은 질문이겠지요.
모두 성불했다는데 저는 아직 왜 중생입니까? 아마 그렇게 물었을지 몰라요.

師云: 你若成佛(이약성불)인댄 爭敎大地成佛(쟁교대지성불)이리요.
네가 만약 성불 했을 진대 , 너이자와 다툴쟁자 인데, 무엇 때문에 어찌 그럽니다.
어찌쟁. 어찌 가르치리요. 대지성불을 어찌 가르치겠느냐?
네가 성불했을 때는 대지성불을 가르칠 필요가 없지요?

왜 그렇습니까? 산하대지 모두가 이미 다 성불했을진대는 산하대지 성불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불을 못했기 때문에 가르친다 이 말이지요.

그러나 앞에 말하고 뭐가 좀 안맞는 것 같지요?
이미 다 성불했다고 해서 그렇게 물었는데 네 스스로 성불한 줄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성불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어요.

우리들 이미 다 성불했습니다. 그런데 성불을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을
미혹이라하고 중생이라고 하지요. 부처님은,

그래서 법화경에도 보면 일체 중생이 구원성불이라
모든 중생들이 구원겁전에 아주 오래오래겁전에 다 성불했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너나 할 것없이 오늘 성불하고 어제 성불하고 백년전에 성불하고
천년전에 성불한 것이 아니어요 아주 겁전에 이미 다 해버렸어요.
다 해 마쳤는데 해 마친 것을 아느냐 모르는냐 이것 차이입니다.
여러분들께서 그것만 알면 내일부터 이 강의 안들어도 됩니다.

進云:  畢竟(필경)에 學人(학인)은 過在甚麽處(과재심마처)니고.
과연 그럼 저는 허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뭐가 잘못 됐습니까 그러니까

師云:  湘之南潭湘之北(상지남담지북)이니라.
湘은 상강이라는 강 이름이지요. 담(湘)이라는 것은 저 북쪽이 있다는 얘기이고
그래서 상강은 남쪽이 있고 담이라는 호수는 북쪽에 있느니라.
무엇과 같으냐하면 어느날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묻기를
“스님 법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하니까
“내가 조용할 때 가르채 주겠다. 아무도 안들을때” 그래서 조용해졌습니다
그래서 스승한테 가서“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니까
대밭으로 데리고 갔다는 것 아니닙니까?
가서 가르쳐 주시기를 “요것은 큰대, 저것은 작은대니라”그렇게 가르쳐 줬답니다.
이렇게 구고정령이 잘 가르쳐줘도 그것을 못알아 들으면 말귀가 좀 안 트인것이지요?

그래서 상강은 남쪽에 있고 담호는 북쪽에 있느니라 그랬어요.
그럼 왜 남쪽에 있고 북쪽에 있느냐? 그 묻는 것의 해답은 본인이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제자가 다시 말하기를

進云  還許學人(환허학인)으로 懺悔也無(참회야무)니가.
저로 하여금, 저 학인으로 하여금 참회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제가 업장이 두껍다 이말이지요. 스승에게 참회를 하겠습니다.

스승에게 참회를 한다는 것은 머리는 어디에 가서 깎아도 상관이 없는데
한참 스승을 모시고 제자가 되는 하나의 행위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師云  禮拜着(예배착)하라.
그럼 절해 봐라 그랬어요

僧이  (纔拜)(재배) 라
절했다는 것이지요

師云  獅子(사자)는 咬人(교인)하고 漢盧(한로)는 逐塊(축괴)니라.
사자는 사람을 물고 개는 흙덩어리를 문다
이 말은 다 이유가 있는 얘기지요?

사람이 사자에게 돌을 던지면 사자는 돌을 쫓아가지 않습니다.
던지 사람을 쫓아가서 물어버리지요.
그런데 개는 돌을 던지면 사람을 쫓아가지 않고
돌을 쫓아가서 뭅니다. 그러니까 바보 같지요. 그런 얘기입니다.

다음 글을 한번 더 보겠습니다.

師乃竪拂(사내수불)하시고 召大衆云此是選佛場(소대중운차시선불장)이며
心空及第歸(심공급제귀)
니 怜悧漢(영리한)이 若向者裏(약향자리)하야
사내 수불하시고 세울수자와 떨칠불자, 불자라는 불자지요. 불자를 이렇게 세우시고
소대중은 대중들을 불러서 이르시기를 차시선불장이며 이것이 여기가 바로 선불장이며
그런 얘기입니다. 부처를 뽑는 도량이다. 그런 얘기지요

심공급제귀니 마음을 비워 급제하여 돌아간 것이니, 마음을 텅 비워야 되는데
마음을 비우지 못하면 안되지요? 참선하는 사람이 마음을 비우지를 못하면
참선 할줄 아는 사람이 안됩니다.

그래서 선을 할려면 제일 먼저 마음부터 텅 비워야 되어요
어떤 이해 관계도 끊고, 사량 분별심도 끊고, 좋다 나쁘다고 끊고
전체를 놓아버리고 오직 한 생각 “이 뭐고를 해야 바로 참선하는 자세가 된다”
그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약향자리하야, 이곳에 이르러서는, 증득하면, 얻어 드릴 것 같으면

見得(견득)하면 便見龐居士(변견방거사)의  安身立命處(안신입명처)니라
방거사 엊그제 설명 한번 드렸지요? 바로 방거사의 안신입명처를 볼 것이니라 그랬어요
안신입명처, 안심입명처라고도 씁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안신입명처라고 했어요.
안신입명처는 몸을 편안하게 해서 목숨을 세우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얘기지요.
안신입명처가 어디겠어요. 바로 이 자리이지요.
다시 다른 말로, 똑같은 말은 아니지만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집고 일어난다”고 하는 말을 하지요?

안신입명처를 다른 곳에서 찾으면 안됩니다.
“아하 여기서 살기 싫어”“대한민국 도저히 내가 살수가 없어.미국 가서 살아야 돼”
외국 가서 사는 사람들은 똑같은 말을 다 합니다.

“내가 한국에서 이렇게 일했으면 다 성공했을 것인데”
백이면 백명 다 그렇게 말합니다.

만약 한국에서 하듯이 외국에서 살면 절대로 살수가 없습니다.
외국 가면 뭔가 남달라지고 새로운 각오를 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살수가 없어요.

그래서 자기가 사는 곳이 곧 안심입명처 입니다.
그곳을 두고 이곳 저곳으로 피해 다니면 결국 그는 안신입명처를 얻을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안신입명, 또는 안심입명 그렇게 두가지 말을 쓸수가 있습니다.

旣見龐居士(기견방거사)의 安身立命處(안신입명처)인댄
이미 방거사의 안신입명처를 볼진대
방거사가 어떻게 살았느냐를 볼진대는 그런 얘기입니다.

便見從上佛祖(변견종상불조)의 安身立命處(안신입명처)요
문득 위 조상대로부터 불조, 부처님과 조사님의 안신입명처라
안신입명처로 볼 것이요, 그랬어요
방거사의 안심입명처만 아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불조의 부처님이나
조사 스님의 전체의 안심인명처를 볼 수 있다 그런 얘기입니다.

旣見佛祖(기견불조)의 安身立命處(안신입명처)인댄
이미 불조의 안신입명처를 볼진대는

便見自己(변견자기)의 安身立命處(안신입명처)리라.
바로 자신이 안신입명처를 볼 것이니라 그랬어요
바로 해도 되고 문득해도 됩니다.
문득 자기의 안신입명처를 볼 것이니라.

남의 안신입명처를 보고 자기 안신입명처를 보지 못하면 안되겠지요?

安身 立命이란 정법 안장(正法眼藏) 열반 묘심을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가섭한테 전한다고 했지요?

하루는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꽃을 드니까 가섭이 빙그레 웃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정법 안장(正法眼藏) 열반 묘심을
내가 가섭에게 전하노라.“ 그랬어요.
그 때 모든 대중들이 멍했습니다.
“저게 무슨 소리야 부처님께서 생전 우리한테 하시지 않는 말씀을 하시네”
두분이 말씀을 한마디도 없이 한분은 꽃을 들고 한분은 빙그레 웃기만했는데
바로 말씀하시기를 “정법안장 열반묘심을 내가 가섭에게 전하노라”

이 말이 무슨 뜻인고하면
정법은 바른 법, 바른 진리, 한자로 보면 이 진리라는 것을 눈에 감췄다 했어요.
안장은 눈안에 감출장

그래서 목격전수라. 눈이 딱 마주칠 때 눈으로 다 전한다 이 말이어요
정법안장이라는 것은,

이 정법을 글로 써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탑을 세워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절을 세우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법을 가진자와 깨달은자가 서로 주고 받을 수 있고
그것을 점지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것 뿐입니다.

열반묘심이라는 것은 정법안장을 설명한 얘기지요.
깨달은 묘한 마음이라는 얘기지요.
깨달은 이 묘한 마음을 바로 잡는다. 그런 얘기입니다.

아란이 나중에 그랬다는거예요.
법회 마치고 나서 형님!, 형님이라 했겠어요. 스님! 이라고 했겠지요
한국식으로 하면 사형제니까
“사형님! 아까 부처님께서 정법안장 열반묘심을 사형님에게 전한다고 했는데
도대체 이게 뭡니까?“
“ 뭐 받으신 것이 있습니까” 그렇게 물었어요 그러니까
가섭이 아란에게 말하기를
“너의 그 찰간당(刹竿幢)을 넘어뜨리면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다그랬어요.
그 말씀이나 그 말씀이나 이지요?

찰간당이 뭡니까? 여러분들 절에가면 기둥처럼 세워 놓은 쇠막대기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 있는 절 많이 없어요. 옛날 절, 법주사에 있고 몇가운데 있습니다
돌로 해 놓은데도 있고. 그런 것이 없는 곳에는 큰 나무를 세워 놓은 곳도 있습니다.

철간당이라는 것은 그 절에 깃발을 올리고 휘날리게 하는 것인데
선가에서는 이것을 다른 의미로 쓰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쁜 버릇, 마음의 아만상, 아상 이런 것들이지요.
아상 이런 것을 다 꺾어 버리면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다.
꺾으면 이미 가르쳐 주지 않아도 다 알게 됩니다.

우리들이 열심히 선사께서 가르쳐 주신 선어를 공부하시고
수행하시면 문득 어느날 내 스스로가 구원겁전에 내가 깨달아 있는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내 안에 조사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안신입명처가
불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에 있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