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라고 하는 것이 어렵다 그러는데 남의 나라말 치고
어렵지 않은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쉬운 언어라고 해도 남의 나라말은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남의 것이기 때문에 쉽지가 않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한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언어가 한문으로 많이 조성이 되어 있고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언어처럼 어려운 것 같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한문도 보면 대게 경전이나 어록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수백년 전에 문법이 잘 만들어지기 이전의 글들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쓰여져 있는 한문들은 화북 그러니까 북경이나 이런 위쪽 지역에서
사람들이 쓰던 한문체하고 산동성이나 한나라 지방의 문체, 그 다음에 초나라라고 하지요.
저 남쪽지방 사람들의 문체 전부 조금씩 다릅니다.
똑같은 한자를 써도 의미가 다르게 쓰는 것이 있고
글자를 마구 섞어서 쓰여 놓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 한문입니다.
그 점을 아시고 한문 공부를 하시면 또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요.
그리고 또 어록 같은 것은 특히 지방에 사는 분들의 말씀을 가감없이
옮겨 놓은 것이기 때문에 어떤 규정된 표준어라는 것이 없다 이 말이지요.
표준어라는 것은 극히 근세에 나타난 하나의 언어입니다.
한번 볼까요?
高峰和尙(고봉화상)의 說法(설법)이 如雲如雨(여운여우)커늘, 그랬지요?
고봉 화상은 알겠지요? 그것은 새길 필요 없겠지요?
설법도 다 아시는 것이고
여운여우커늘 했어요. 구름과 같고 비와 같거늘, 그랬지요.
그러니까 구름이 드리워지면 비가 오지요?
구름이 덮어서 온 세상을 덮는 것 같고
비가 와서 온 세상을 적시는 것과 같다 이 말이예요.
直翁洪君(직옹홍군)
직옹거사를 홍군이라고 했을 때 우리 나라에서는 보통 군자를 쓰면
어른이 젊은이들한테 말을 할 때 이군, 박군, 하듯이 홍군 썼는데
여기서도 조금 그런 뜻에서 쓰여진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또 한편으로는 거사라던가 그런 것이 없어서 쓴 것 같기도 합니다.
撮其奇秘(촬기기비)하야, 그랬지요.
직옹 홍군이 공부하는데 신기하고 비장한 법을 간추려서, 기특하고 기묘하고
기밀한 것, 비밀하고 기묘한 것을,
촬(撮)자는 뭐냐하면 간추렸다, 추렸다, 잡았다, 촬영할 때 그 촬자인데,
간추려서 그런 말로 풀이를 했습니다.
名曰禪要(명왈선요)라하고
이름을 뭐라고 붙였느냐하면 선요라고 했다.
선요는 선의 요체 그랬지요?
永中上人(영중상인)이
영중사 상인은 스님을 얘기한다고 했지요?. 영중사의 스님이,
從而鋟梓(종이침재)하야
쫓을종, 새길침,재는 나무에다 새겼다, 침재했다 그런 뜻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뭐라고 하냐하면 인연을 쫓아서 새겼다 그런 얘기지요.
인연을 쫓아서 책을 펴서, 침재에는 책을 피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 뜻이예요. 책을 펴서
以廣其傳(이광기전)하니
써 널리 그것을 전하니,
그것이 뭡니까? 고봉 화상의 어록이지요? 말씀, 법문,
고봉 화상의 그것을 널리 전하니
擧網而得綱(거망이득강)이며
망을 들어서 강을 얻는 것이며
망이란 그물이지요. 그물을 들어서 벼리를 얻는 것이며 그랬어요
벼리를 들어야 그물이 잘 들어진다고 그랬지요? 지난번에 그랬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벼리를 들어서 그물을 얻는다
다음 구절에 보면 더 잘 나타나지요? 안쓰는 글자가 나타났어요.
挈裘而振領(설구이진령)이라
잡을 설, 갑옷 구,인데 여기서는 갑옷이 아니고 옷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서는 옷구자입니다. 지역에서 쓰는 글자입니다.
일반 옷깃을 드는 것이 아니라 옷자락을 들어서 우리말로 하면
옷자락을 들어서 옷깃을 펼침이라. 그런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물을 들어서 벼리를 잡으며
옷자락을 들어서 옷깃을 듦음이라.
그러니까 옷깃을 들어서 옷자락을 들어야 되는데
옷을 들어서 옷깃을 듦음이라.
이 말이 왜 나왔느냐 하면 여러 해 법문을 잘 들어서
이 법문을 통해서 곧 중요한 부분을 알게 된다.
중요한 부분이 강과 령이지요. 그래서 쓰신 말씀입니다.
將俾學者(장비학자)로 因法語之要(인법어지요)하야
장차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장차 비학자로, 여기서 비자는 더할 비자이지요.
뭐좀 더 보탠다 그런 뜻이어요. 배움을 보탠다, 도를 보탠다, 그런 뜻이어요.
도를 배우는 자로, 그런 뜻입니다.
인법어지요하야, 법어의 중요함으로 인해서
고봉화상의 법문이 중요함으로 인해서
以會道體之全(이회도체지전)하니
요체로 인연해서 회도체지전하니 온전한 도의 실체를 깨닫게 되나니
온전하게 도의 체를 알겠나, 모일會자는 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이런 경전이나 특히 법어록 같은데를 보면 이 회(會)자가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이 會자는 안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道는 말하다는 뜻과 진리라는 뜻이
함께 나타납니다.
其開牖後學之心(기개유후학지심)이 可謂篤矣(가위독의)로다.
그 후학들의 마음의 창문을 열어서, 창유자 마음의 창을 열어서, 굉장히 싯적입니다.
그 후학들의 마음의 창을 엶이 가위독의라, 가이 도탑다 할 것이다.
고봉 화상의 설법이 마치 그와 같다 이 말이지요.
구름과 같고 비와 같아서.직옹거사가 기묘하고 아주 비밀스러운 스님의
말씀만을 영중상인과 함께 침재해서, 이것을 다 새기고 책을 내서 이것을 널리 전하므로
공부하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요체를 깨닫게 하니까
(후학)뒤에 배우는 사람들이 참 좋겠다.
마음을 열어 인도함이 가이 도탑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우리들도 지금은 발문이니까 그렇지만
선요의 본문에 들어가면 여러분들도 깜작 놀랄 것입니다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고봉 화상의 우뢰같은 설법이 나옵니다.
다음 구절을 보기전에 오늘 늦게 넣어 놓은 글이 하나 있습니다.
밑에 강의 한번 보세요.
[강의] 〈전등록〉 제8권 남전보원전에 마조 도일 스님이 나옵니다
제가 마조 도일 선사을 이야기 하려합니다
선 이야기하니까 도일 선사가 생각이 나서 여기 적어 넣었어요.
마조 도일 선사 문하에는 800여명, 혹은 1000여명의 수행자가 운집해서 공부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마조 도일 선사 밑에서 법을 전해 이은 제자가 139명이나 된다고
하니가 마조가 어떤 분이라고 하는 알겠지요?
그리고 역대 선사 가운데 성씨를 써서 조사어에 명칭을 붙인 분은 마조 선사 뿐입니다.
그래서 마씨지요? 마조 스님에 대한 설화가 많은데
하루는 마조 스님이 고향에 갔습니다.
고향에 가니까 빨래하는 아즈매가
“아이구 저 아무개가 마씨네 아들이 아닌가?”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그러지요.
“스님들이여! 대덕들이여! 고향일랑 가지 마소.”
“고향에 가면 나는 아직도 여전히 마가 라오.”
여전히 마가, 마씨라고 부른다
사찰에 돌아오면 큰스님인데, 800명,1000명의 수행자가 있고
수없는 제자가 있고 139명이라는 전법을 이은 제자가 있어서 부처님처럼 우러러 보는데
고향에 가니까 이 아낙이 “ 저게 마가 아무개 아닌가?”그렇게 부른다 이 말이지요.
이 마조 스님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있지요?
마조 스님은 누구인가 하면 당시의 신라 스님인 무상(無上)스님이라고 계셨는데
이 스님이 중국에 건너가서 후학을 하게 되지요. 신라에 돌아오시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사천성 성도라고 하는데 정중사(淨衆寺)에 절을 짓고 수행을 하십니다.
그 때 당시만 해도 계율이 더욱 엄격하고 율종이 상당히 강한 그런 시대라고
볼 수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또한 그 때만 하더라도 물론 달마도사가 왔다 갔지가 백수십년이 됐지만
아직 중국에는 달마선이 그렇게 활발하게 전개되지 아니할 때입니다.
이 무상 스님이 거기서 수행을 하시는데 이런 기록이 있어요
무상 스님 밑에서 천여명의 승려가 살았는데, 스님이 그 많은 젊은 스님들하고
논 밭을 일구어서 곡식을 내어 그 곡식을 흉년이 들면 마을의 못먹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줬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 스님의 복덕이 자자해서 그야말로 멀고 가까운데서 인산인해로
스님을 찬양하고 또 제자들이 수없이 몰려왔던 것이어요.
그리고 스님이 정중사를 짓으며 대종을 만드는데 성도 안에 거의 쇳붙이가
없을 정도였데요. 전부다 절 불사하는데 사용하시라고 지역 사람들이 스님께
갖다드렸다는 얘기지요
그 만큼 복덕이 높으셨던 스님입니다.
그 가운데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분이 누구냐하면 마조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남악 회향선사의 제자가 되었느냐하면
육조 혜능 대사가 돌아가시고 약 100여년 후에 중국의 신회(信會)라고하는 스님이
나타납니다. 이 신회 가만히 보니까 뭐를 만들어야 하냐하면 이 법선들을 잘 엮어서
법계, 혈맥을 만들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위에 스님들이 어떤 좋은 스님들이 있는가 살펴보니 마조 스님이 대단한 스님이어요.
그래서 마조스님을 남악회향선사의 제자로 이름을 집어 넣은 것입니다
전혀 관계도 없는 스님을 집어 넣은 것이지요.
그런데 그 때 당시 100여년후에 그것을 그렇게 넣었다고 해서
그 책이 금방 세상에 백권 천권 만권 세상에 팔려서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이 몇 년 지나고는 그것이 그러니라 하고 그냥 넘어갔던가 봐요.
그래서 지금까지 그렇게 전해지고 있는데 다른 기록들은 그렇지 않는 부분들이
있어서 아주 가까운 근세에 밝혀진 얘기입니다.
신회 스님이 그렇게 만들은 공덕으로 그 후로 마조스님을 남악회향선사 제자로 만들고
남악회향선사는 육조혜능 대사 제자가 맞습니다.
이렇게 만들고 그 당시만 해도 금강경이 아닌 능가경을 선방 수좌들이 제일 중요한
선의 경전을 삼았을 때입니다.
그 능가경을 하치하고 금강경을 대치하는 그런 관계가 이루어진 것이 누구냐하면
이 신회가 그렇게 만들은 것이예요.
그렇게 보니까 그 후로 마조 제자가 백장이지요.
백장선사가 하신 말씀이 있지요
일일불작이면 일일불식이다.
(一日不作이면 一日不食이다)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먹지 않겠다.
이것은 곧 스승인 마조가 그렇게 행했고 마조 스승인 무상 스님이 그렇게 행하셨기 때문에 백장회해에 와서 그런 절의 사규, 청규가 생겨난 것입니다.
청규란 청중 대중들이 행한다 해서 청규라 하지요.
또 무상 스님의 상좌는 신행이라고 있었어요
신행이 정중사 주지도 하고 그 후손을 맡아서 했는데
신행도 역시 계율이 철저할 뿐만 아니라 수행이 아주 높았었던가 봅니다.
하루는 신행스님이 열반에 곧 들게 되는데 제자가 가서
“스님 열반에 드실랍니까” “그래 지금 열반에 들라고 한다”
“다음에 어서 태어나시겠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나는 요앞 산 마을의 아무개 집의 마소로 태어 날란다” 했습니다.
마소가 뭡니까? 말이나 소로 태어난다 이 말이지요.
감히 있을 수 있는 얘기입니까? 큰 스님께서 마소로 태어나다니,
그래서 제자가 물었어요.
“저는 어떻게 할까요” 하니까
“너는 꼴이나 한 짐 베어 가지고 와라 ” 그랬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옛날 스님들이 수행했던 것이나 기개는 우리들이 따라서 배워야 될 점들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갖습니다.
이 내용을 좀 볼까요?
學者(학자) 於此(어차)에 果能優遊而求之(과능우유이구지)하며
배우는 자가 여기 선요에서 넉넉하게 놀면서 구하며,
아주 넉넉하게 구하는 것을 우유이구지 라 써요
之가 중간에 들면 말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지만
之가 제일 끝에 붙으면 지시사가 됩니다.
그것을 구하며 그런 뜻이어요.
그러니까 배우는 자는 가히 여기 선요에서 넉넉히 그것을 구하며,
그것이 뭡니까? 깨달음이지요.
之 자는 깨달음을 가르키는 얘기입니다.
厭飫而趨之(염어이추지)하면
실증내지 않고 물리지 않고 그런 얘기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마디하니까 이상해서 그냥 실증내지 않고,
염어이추지하며, 염어 그 자체를 실증내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쫓으면, 여기도 之자 또 있지요?
그 之가 열심히 공부해서 쫓으면 그런 얘기예요.
공부한다는 의미를 갖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이 선요를 쫓으면, 옛스승을 말씀을 쫓아 가면
渙然氷釋(환연빙석)하고
확연히 얼음이 녹는듯하고, 확연하게
怡然理順(이연리순)하리니
이연이 그렇게 그런 얘기지요.
그러한 이치에 따라서 그런 얘기입니다.
그렇게 이치에 따르게 되니
則工夫次第(즉공부차제)와 進趣操略(진취조략)을
공부하는 순서지요? 차제는
진취조략은 나아가 공부함을 계락한다. 계획하고, 딱 잡아서 조략하고
老師(노사) 已和盤托出(이화반탁출)하사
노스님(고봉화상)께서 이미 모두 다 내 보여
화반탁출이라는 것은 큰 접시에 모든 음식을 잘 차려서 책상 위에 딱 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차렸습니다. 이것입니다 그런 얘기입니다.
이렇듯이 노 스승께서 지금까지 한량없는 법문을 화반탁출했다
잘 내어 보이셨다, 고루고루 말씀을 하셨다 그런 뜻이지요.
모두 다 내 보이시고
盡在此書矣(진재차서의)언만은
모두다 이 글 속에 있건만, 이 선요 속에 있다 이말이지요.
特患學者(특환학자) 未能猛烈承當耳(미능맹열승당이)이로다.
특별히 배우는 이들이 맹렬히 그 뜻을 받들지 못할까 걱정함이로다. 그랬어요.
患자는 특환이라고 쓸 때 이 환은 우환이라고 쓸 때 쓰는 患이지요.
근심한다, 특별히 배우는 자가 능히 맹렬하게 공부해서 그것을 이어가지 못할까
걱정하는 바이로다. 이런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