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선요발(禪要跋) 입니다.
선요발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뒷글입니다
발문이라고 그러지요. 뒷글이라고 하는 것은 요즈음 말로 책을 쓰고
후기를 쓰는데 후기에 해당합니다.
보통 책을 쓰고 후기를 쓰는 것은 서문을 쓰고 후기를 쓰지요.
처음에는 서문이 있고 마지막에 후기가 있는데
책을 쓰고 난 소감 그런 것들을 쓰는 것이 후기라면
선요발도 역시 후기와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쓰는 후기인데 喬祖는 고봉 화상의 법문을 낱낱히 기록
해 두었다가 스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스님의 법문을 어떻게 하면
후세에 길이 남겨서 선을 공부하는 후학들에게 어떻게 귀감이 될까하여
고심하다가 쓴 글이라 여겨지기도 하고요.
여기보면 신찬(神贊)스님의 얘기, 그리고 윤편( 輪扁)의 얘기가 여기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여기 글을 한 번 봅시다.
글 올려 놓은 것 중에 강의라는 부분이 있는데
신찬(神贊)이라는 스님이 계현(戒賢)이라는 스님을 스승으로 해서 삭발을 했습니다.
삭발을 했다는 것은 스님이 됐다 이말이지요, 삭발을 하고 어느날 계현(戒賢)스님의
허락을 받고 수행길에 떠나게 됩니다.
수행길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선방에 가는 것을 수행길, 납자의 길, 이런 말로
씁니다. 수행길을 떠나서 백장을 찾아 뵙게 되지요?
백장 선사라고 하면 당대에 상당한 분이지요.
백장 선사를 찾아 뵙고 수행을 하고 다시 스승이 계신 고령사(古靈寺)에 돌아옵니다.
계현이 이제는 신찬이 백장 선사를 찾아 뵙고 공부하고 그런 얘기는 나중에
기회 되면 또 공부할 수 있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하는 얘기가 재미있어요
어느날 스님한테 신찬이가 왔는데, 10여년 만에 돌아 왔어요.
스님이 목욕탕에 가서(상좌를 아끼고 정말 좋아했던가봐요)
같이 목욕탕에 들어가서 상좌인 신찬한데 등을 좀 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신찬이 뭐라고 하냐하면
“호호 법당(好好法堂)이” 그런단 말입니다.
“호호법당이라는 것은 좋고 좋은 법당이여.” 그런 얘기입니다.
그러면서 “이불불령(而不佛靈)이로다 ” 그랬습니다.
“ 법당은 좋은데 부처가 신령이 없다” 신령스럽지 못하다 그런말이지요.
고령스님이 뒤를 싹 돌아봤습니다. 그러니까 신찬이 하는 말이
“수불불령(雖不佛靈)이나 야능방광(也能放光)이러구나 ” 그랬어요.
“ 비록 부처가 신령스럽지는 못한데 방광은 할 줄 아는구나” 그랬어요
그러니까 스승을 놓고서 조롱한 것이지요? 제자가,
그러니까 스승이 깜짝 놀라가지고 이 녀석 봐라.
스승한테 별소리 다 하는구나. 그렇게 하고서도 스승이 별말씀 없었어요.
이후에 계현스님이 경을 좋아하셨던가 봐요.
창문가에 앉아서 경전을 읽고 있는데 승찬이 들어가니까
마침 벌이 한 마리 들어 왔습니다. 벌이 들어와서 창문을 뚫고 계속 나갈라고
하거든요. 창문을 보통 창호지로 바르지요? 창문을 뚫고 나가려고 해도
창문을 뚫고 나갈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신찬이 그러는 거예요.
“공문에불공출(空門)에 (不肯出)하고” 빈문에 나갈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러니까 한쪽 문이 열려 있었던가 봅니다.
“투창야대치(投窓也大痴)로다” 창문만 자꾸 두두리니까 참 어리석구나.
“백년찬고지(百年鑽古紙)인들” 100년동안 종이를 아무리 뚫어봐야
“하시출두일이요” 언제 성불하겠느냐? 그런 얘기입니다.
이것은 스승이 경전을 보고 있으니까
경전이 종이지요? 또 창문도 종이입니다. 그 빗대서 하는 얘기지요.
“공문에 불공출하고 투청야대치로다” 창문을 자꾸 두둘기니 참 어리석구나.
100년 동안 니가 종이를 뚫어 봐라
찬고지인들, 종이를 뚫는다고 하더라도
하시출두기(何時出頭期)이요, 언제 머리를 내겠느냐?
다시 말해서 언제 성불하겠느냐?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스승이 이 때 알아차리고 말하기를
너의 말이 참 이상쿠나, 수행하러 나가서 누구를 만나서 수행을 했느냐?
물었스니다. 그제서야,
그러니까 저는 백장회하에서 수선안거를 하였나이다. 그럽니다
그리고 선사의 가르침을 받고 홀연히 심처를 알았나이다.
심처라는 것은 마음 곳이지요? 마음을 알았다는 얘기지요?
깨달았다 이 말입니다.
이 때 계현이 운집종을 치고 대중을 모이게 한 후 법상을 차려 놓고 법상에 제자인
신찬 스님을 오르게 한 후 법문을 청했습니다.
보통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설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스승이 깨달았다고 하는 제자를 초청해서 모셔놓고
법문을 청하는 것입니다. 법문을 청할 때 함께 절하지요?
이 사바 세계나 세속에는 그런 일이 잘 없지요?
그러나 저에서는 깨달음이 제일로 치니까, 깨달은 사람이 곧 부처요
깨닫지 못하면 곧 중생입니다.
아무리 나이가 백살 천살이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깨닫지 못하면
중생일 뿐이고 깨달으면 부처이다. 그런 얘기지요?
스승이라고 아무리 정해 놓았어도 제자가 깨달으면 제자가 먼저 부처요
그 스승은 바로 그 제자의 제자가 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불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신찬이 법문을 뭐라고 했느냐하면 유명한 말입니다
보통 스님들이 영반을 할 때 영가 천도식이나 시식을 할 때
영단에 대고 많이 하는 말입니다.
영광독요(靈光獨耀) ,신령스러운 빛이 홀로 밝고 밝아서.
모든 사람들마다 신령스러운 빛이 있다 이 말이지요. 그 빛이 밝고 밝아서
형탈근진(逈脫根塵)이라. 근진에서 벗어 났다 그런 얘기지요.
根자는 안이비설신의라던가, 또는 6진, 塵이라고 하는 것은 번뇌, 몸 육신
윤회하는 몸 그런 것을 다 얘기하는 것입니다.
근진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뭐지요? 윤회에서 벗어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령스러운 빛이 홀로 밝게 빛나는데 이런 근진, 육도 윤회에서 벗어났다.
체로진상(體露眞常)요, 체로가, 그 몸체가 들어나서 露는 들어날 로자 그러지요?
다 들어났다 그런 뜻입니다. 몸이 들어나서 참으로 늘 그렇게 항상하다,
그러니까 몸이 들어나서 항상하다고 하는 것은 곧 깨달은 그 체가 부처가 항상
그렇게 있다.
불법의 참골수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소소영영하게 밝게 비추고 있다.그런 얘기지요.
불구문자(不拘文字), 문자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런 뜻이지요. 문자에 메여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문자에 있지 않다. 스승이던지, 누구던지 문자 속에 깨달음이 있다고 하지
마라. 문자 밖에 있는 소식이다 그런 얘기겠지요?
심성무염(心性無染), 마음 성품이 물듦이 없어서
본자원성(本自圓成)라, 본래 스스로 원만하고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그런 말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갖고 있는 자성심, 이 자성은 절대로 물들지 않지요.
아무리 물들일려고 해도 물들일 수가 없습니다.
물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것이 있네요. 물은 절대로 물들지 않습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지요? 홍수가 나서 엄청난 황토물이 빨갛게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그 물을 잘 가라앉히면 그야마로 청정수가 되지요. 맑은 물이 됩니다.
또 홍수가 나서 아무리 물이 빨갛다고 하더라도 그 빨갛다고 하는 것은 황토흙물이지요.
황토흙이 물에 적셔져서 빨갛게 보이는 것 뿐입니다.
물의 알갱이는 H2O 라고 할까요, 물의 알갱이는 어디에도 절대로 물들지 않습니다.
아무리 오염된 물 시궁창에 시커먼 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정수하면 그것도 역시
깨끗한 수정수가 됩니다. 이와같이 물은 물들지 않는다.
물이 물들지 않는 것처럼 심성도, 자성도 절대로 물들지 않는다.그렇게 보면 됩니다.
그래서 심성이 무염해서 본자 원성이라, 본래 원성되어 있다.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어요.
우리 모두, 여기 법문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도“ 아이구 나는 중생이야, 나는 몰라,”
아무리 내가 중생이라고 모른다고 하더라도 내 본성은 절대로 물들지 않는 것이고
원래 원만한 부처이고 원만한 각성이고 각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이지요.
각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곧 아는 것, 그것이 곧 성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성 본성심을 깨닫는 것, 바로 이 것이다 그것은 문자에 얽매이지 않는다.그런 얘기지요.
단리망연(但離妄緣)하면, 그 방법이 뭐냐하면 다만 망념된 인연들을 여의면,
모든 연법을 여의면
즉여여불(卽如如佛)이라, 즉 여여한 부처가 되리라.곧 그것이 여여한 부처님이다.
그런 얘기지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일체의 망념된 인연들을 모두 여의야 되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하지요?
어제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들이 인생을 산다고 하는 것은
누구도 내 의지대로 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이 법문을 듣는 분들도 절대로 내 의지대로 법문을 듣지 않습니다.
무엇인가에 이끌려서 오늘 이 시간에 와서 이 자리에 앉아 있고 제 법문을 듣습니다.
이 법문을 하는 저도 내 의지로 하는 것은 절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인연법에 의해서 그렇게 돌아가질 뿐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내 의지대로 된 것도 아니고
그 어떤 것도 내 의지대로 된 것이 없다.
오직 한 소식 깨달아야만이 그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는 모든 것을
다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알 수 있습니다.
오늘 공부할 때 보면 어떤 부분이 있느냐하면
윤편의 얘기가 나오는데, 윤편 한번 볼까요? 윤편이 무엇인가?
윤편(輪扁)은 壯子의 外篇 천도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濟나라(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나라이름 중의 하나) 桓公(환공)이라는 왕이 있었어요
환공이 독서하는데,
윤편이 뭐냐하면 바퀴를 만드는 사람이지요. 윤편은,
바퀴는 만드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어요
글을 모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손재주가 좋아서 바퀴를 참 잘 만듭니다.
그래서 임금의 연의 바퀴를 만들고, 임금이 탈 수레 바퀴를 만들고 그러니까
대단한 기술자이지요.
그런데 하루는 제나라 환공이 독서하는데
윤편이 지나가다 독서하는 것을 봤어요.
공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 여쭈었습니다.
“환공께서는 어떤 것을 읽습니까?” 하니까 왕이 대답하기를
“옛 성인의 말씀을 읽는다.” 그랬습니다. 환공이 말하기를
이때 윤편이 “성인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어요.
성인이 책에 있습니까? 그렇게 물었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물으니까 “성인은 이미 죽었느나라.” 없다 이 말이어요.
여기에 없고, 성인이 남긴 말씀이라 이말입니다.
이때 다시 윤편이 말하기를
“그러한즉 공께서 읽는 것은 옛 사람의 찌꺼기(찌개미)일 뿐입니다.”
찌꺼기를 아시나 모르겠어요. 콩 두부를 빼고 나면 찌꺼기,
그런 것들이 다 찌개미입니다.별 볼일 없는 것이지요.
옛 사람의 찌꺼기입니다.
이때 공이 말하길 “ 過人이 독서를 어찌 윤편같은 존재가 알까” 어떻게 너 같은
존재가, 바퀴나 만들고 있는 너 같은 존재가 알수 있겠느냐? 이렇게 말하면서.
“네가 말할 수 있으면 살 수 있으려니와 말하지 못한다면 죽게 되리라”.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이 때 윤편이 말을 하지요.
“성인의 말씀을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인의 말씀을 따라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책을 아무리 읽어도 성인의 말씀은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실천행, 성인이 말씀하신 그 뜻을 따라가는 것이 성인을 만나 뵙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목숨을 건지게 되지요
죽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시사하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들이 공부하는 것은 성인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지요.
성인의 말씀을 배우는 이유는 뭐냐하면
성인의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공부해서 부처님 말씀대로 또는 조사스님 말씀대로
행하는 노력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자 선요를 한번 볼까요? 발문의 제일 첫머리입니다.
古靈(고령)은 以閱經(이열경)으로,
고령은 뭐라고 했지요? 고령사라고 했지요, 여기서 고령하면 보통 누구를 말하는가
하면 계현 스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열경으로, 책을 보는 것으로, 신찬 스님이 경이 있는 것을 그랬어요
爲鑽古紙(위찬고지)라고하고 그랬어요.
옛종이만을 뚫어지게 본다하고
輪扁(윤편)은 以讀書(이독서)로 爲味糟粕(위미조박)이라하니,
윤편이 말하기를 환공이 독서하는 것을 술 찌꺼기라고 하니
良以道(량이도)는, 술찌꺼기만 맛볼 것이라고 하면서 참다운 도는
우량한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런 뜻도 되고, 진실한 진리, 도라고 하는 것은
不可以言語文字(불가이언어문자)로 求也(구야)일새니라.
언어 문자로 구하지 못한다 그랬습니다.
진리는 언어문자로 구하지 못하는 것이요.
우리가 깨닫는다고 하는 것도, 모두가 다 도라고 하는 것도,
언어 문자로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많이 본 사람일수록 답답해진다고 했지요?
결국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깨닫는 것은 책을 읽는 것에 있지 않다.
곧 실천하는 곳에 있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여러분들께서 참선(선요)을 하실 때에는 하루에 한 시간씩
참선을 하시면 곧 실천이 되고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然(연)이나, 그러나
道無方(도무방)하고, 방위가 없고, 그랬어요.
어떤 방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도라고 하는 것을 공부하면서 어떤 형상이나
방위나 이런 것이 없다 이 말이지요
體無形(체무형)하니, 도의 체도 몸도 형상이 없으니
그러므로 도의 실체가 없으니,
似非言語文字(사비언어문자)면 何從而明之(하종이명지)리요
언어 문자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어떻게 도를 밝힐 수 있으리요.
언어 문자가 곧 도는 아닐지라도 도를 얘기하자하면 언어 문자가 아니면
어떻게 밝힐 수 있겠느냐? 말 할수 있겠느냐 그런 얘기지요.
이 발문을 쓴 것은 선사께서 애쓰셔서 지금까지 참선하는 방법의
모든 것을 가르치셨는데 그런 것들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는 결국
쓰여진 것은 뭡니까? 도지요?
그래서 도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선공부, 도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대개 선이지요?
선공부를 어떻게 하느냐? 선 공부를 잘하는 것만이 곧 도를 깨닫는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선공부를 하는 방법을 보면 여기 선요발문에 다시 글을
올려 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요 발문에 보면 뭐냐하면 의리선, 조사선 또는 여래선이 있지요
여래선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에 따라서 수행하는 것,
수행해서 이심전심으로 깨닫는 것을 여래선이라고 그럽니다.
보통 조사선하면 간화선을 참구해서 그야말로 단박에 돈오하는 것을
보통 조사선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조사선은 제일 위에 놓지요.
그리고 의리선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뜻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처럼 지금 선이 뭐다. 깨달음이 뭐다. 진리가 뭐다.
이렇게 말을 해서 그것을 이해시키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을 보통 의리선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의리선을 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의리선은 아무리 하더라도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 그렇게 됩니다.
참선법에 세가지가 있는데, 여래선, 조사선, 의리선 그 가운데 여래선도 해도 좋고
조사선도 해도 좋지만 의리선만큼은 진실한 도를 열어갈 수가 없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