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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7-08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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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공부방] [능엄경] 능엄경 해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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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9,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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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변하지 않는 성품
우리의 현실생활아 파도처럼 움직일 때 아무리 바람이 불고 파 도가 치더라도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참마음에 대해서 <능엄경>의 가르침을 들어보자.
우리는 큰스님네의 상단법문 자리 에 참석할 때마다 참마음에 대해서 듣곤 한다. 그런데 그 참마음 이 보통의 것이 아니라 어떤 실체적인 것으로까지 묘사될 때 당 황하게 된다. 우리는 구름으로 생사를 비유하는 조사스님네의 글 귀를 다비식을 할 때마다 듣는다. 난다고 하는 것은 한 조각의 구름이 모이는 것이요. 죽는다고 하는 것은 한 조각의 구름이 흩어지는 것이다. 뜬구름 자체에는 실다움이 없으니 생사의 오고감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물건이 항상 스스로 드러나 있으니 그것은 생사를 뛰어넘는 것이다. 여기서 생사를 뛰어넘는 한 물건은 무상. 무아. 공의 원칙을 벗 어나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어떤 말씀이나 사상도 공사상과 일치할 수 없으면 그것은 불교적인 사상이 아니다.
<능엄경>의 참마음이 큰스님네의 상단법문에 나오는 참마음 그리고 위의 글귀에 나오는 생사를 뛰어넘는 한 물건이 공사상과 공존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파사익왕이 부처님을 만나서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길을 여쭌다. 그러자 부처님은 죽어 본 적도 없는데 왜 죽는 길을 걱정 하느냐고 물음으로써 파사익왕의 마음을 떠본다. 그러자 왕이 대답한다. 부처님이시여, 무상하게 변천하는 몸이 비록 없어져 보지는 않았으나 불이 스러져 재가되듯이 점점 늙어 감을 봅니다. 스무 살 때를 젊었다고 하지마는 열 살보다는 늙었고 서른 살 때는 또 스무 살보다 늙었습니다. 지금은 예순 두 살입니다만 십 년 전은 훨씬 건강했습니다. 그 동안 변하는 것을 우선 십 년씩 잡아 말하였지만 자세하게 생각하오면 어찌 십 년 이십 년뿐이오리까. 실로는 해마다 늙었으며 또 어찌 해마다 뿐이오리까. 달마다 날마다 달라졌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잠깐이라도 머물러 있지 아니했사오니 이 몸이 필경에 없어질 줄 아옵니다. 파사익왕이 정말 진지하게 인생의 무상함을 이야기하자 부처님 은 없어지는 몸 가운데에 없어지지 않는 성품을 보여 주겠다고 하신다. 세 살 때 보던 강과 예순 두 살 때 보던 강이 차이가 없다는 말을 이끌어 낸 부처님은 변하지 않는 것을 말씀하신다. 대왕은 늙었지만 강을 보는 정기는 늙지 않았으니 늙지 않는 것 은 변치 아니할 것이며 변하는 것은 없어지지만 변하지 않는 것 은 오고감이 없을 것이다. 이 몸은 죽더라도 그 보는 정기는 없 어질 것이 아니거늘, 어째서 외도들이 말하는바, 죽은 뒤에는 아 주 없어진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까? 그 대회를 듣고 있던 아난존자가 문제를 제기한다. 만일 보고 듣는 성품이 나고 죽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저희들 에게는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감각기관에게 희롱 당한다고 말씀 하시나이까? 아난존자의 질문은 보는 성품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변하지 않 는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족한데 그것이 어떻게 버려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자 부처님은 세상의 인연법에 의해서 나타 나는 무상한 것들이 모두 참마음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몸. 마 음. 허공. 강산 등이 모두 묘하고 밝은 참마음 가운데 잇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난존자의 머리는 아직도 확연하지 않다. 항상 한 참마음이 있고 그 참마음에 의해서 일체만물이 생겨난다는 말은 알아듣겠다고 한다. 참마음에 의해서 일체만물이 생겨난 다는 말은 마음이 백지상태의 자연에 개념과 이름과 가치 등을 붙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참마음이 우리들 각자의 것이라는 점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다른 마음은 다 거짓의 것, 없어져 야 할 것이데 어째서 그 참마음은 나에게 항상 있는 나의 것이냐 는 의문이다.
부처님이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대답하신다. 아난아,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나타난 인연이 있느니라. 햇빛은 해의 인연, 어둠은 구름의 인연, 통하는 것은 틈의 인연을 가지 고 있느니라. 그러나 이러한 모양을 보는 ,이 참마음의 성품은 아무런 인연이 없느니라. 밝고 어두운 것, 통하는 것과 막힌 것 은 각자 차별이 있지만 참마음은 차별이 없느니라. 파별 있는 것 은 대상경계이거니와 보는 성품은 차별이 없느니라. 비유하면, 모난 그릇 속에서 모난 허공을 보는 것과 같나니 모난 그릇 속에 서 보는 모난 허공은 결정적으로 모난 허공이 아니니라. 똑같은 허공을 둥근 그릇에서는 둥글게 볼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릇이 모나고 둥글지언정 허공은 모나지도 둥글지도 않느니라. 아난아, 모든 중생들이 끝없는 옛적부터 저의 본 성품을 잘못 알아서 물건인 양 여기면서 본마음을 잃어버리고 물건의 지배를 받는 탓으로 그 가운데서 큰 것을 보고 작은 것을 보거니와 만 일 물건을 지배할 수 있게 되면 여래와 같이 마음이 뚜렷하고 밝 아서 바로 이 자리에 시방세계를 다 넣을 수 있을 것이니라. 아난아, 여기서 밥을 지을 때에 손에 돋보기를 들고 햇빛에 비 치어 불을 내나니, 이 불이 돋보기에서 나느냐, 쑥에서 생기느 냐, 해에서 오느냐. 돋보기는 손에 들렸고 해는 하늘에 떴고 쑥 은 땅에 난 것인데 불은 어디서 온 것이냐? 해와 돋보기는 멀어 서 화합할 수 없고 불이 난데없이 저절로 생기지도 아니할 것이 니라. 아난아, 여래장 가운데 불의성품을 가진 참된 공과 공의 성품 을 가진 참된 불이 맑고 깨끗하고 본래 그러하여 법계에 가득하 여 있으면서 중생의 마음을 다르고 아는바, 그 격에 맞추어서 나 타나는 것이니라. 세상 사람들이 한 곳에 돋보기를 들면 한 곳 에 불이 나고 온 법계에서 돋보기를 들면 온 볍계에 불이 났느니 라. 불은 세상에 가득한 것이니 어찌 나는 곳이 따로 있겠느냐? 부처님은 생멸과 차별이 없는 참마음을 허공과 불에 비유한다. 허공을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보이고 네모난 그릇에 담으 면 네모나게 보이지만 실제로 허공이 둥글거나 네모나지 않듯이 참성품이 중생의 그릇에 따라서 생겨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생기지도 없어지지 도 않고 항상 그대로 있다고 한다. 허공의 비유에서는 참마음이 중생의 미혹 때문에 차별 있게 보인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부처님은 또 참마음이 이 세상에 항상 꽉 차 있는 것을 불로 비 유한다. 불이 어는 곳으로부터 와야만 잇는 것이 아니라 불을 지 피기만 하면 불이 나타나므로 불은 보이거나 안 보이거나에 상관 없이 세상에 항상 하고 꽉 차 있다. 참마음의 서품도 불과 마찬 가지라고 한다. 참마음은 이 세상에 꽉 차 있어서 누구든지 그것 을 개발하기만 하면 나타난다는 것이다. 앞에서 아난존자는 참마음이 있는 것까지는 인정했지만 참마음 이 바로 내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 처님이 말하는 이 참마음은 누가 특별히 소유하고 안하고를 말 할 것이 없다. 불을 피우면 불이 나오듯이, 참성품을 보는 사람 에게는 누구에게나 참성품은 그의 것이다. 참성품은 떨어지거나 파별적인 것이 아니라 연결되고 전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전부 나 의 것이면서 동시에 모두의 것이다. 큰 것과 작은 것의 차별을 떠나서 있기 때문에 바로 이 자리에서 모든 참모습의 견본이 된 다. 우리는 서두에서 부처님이 말씀하는 변함없는 참마음에 대해서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어떤 생각이 불교적인 것이 되려 면 공사상과 일치해야 한다. 공사상은 영원히 변함없는 것을 인 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하는 참마음의 내용을 들어보 면 어떤 개인적인 나를 내세우는 참음이 아니라 감각기관에 놀아 나서 참마음을 못 보는 나를 보린 다음에야 얻어지는 그런 것이 다. 여기서의 참마음은 허공과 같고 불의성질과 같은, 온 세계 에 특정하게 없으면서도 온 세계에 항상 꽉 차 있는 그러한 것이 다. 개인적인 소아로서의 참나가 아니라 우주저긴 대아로서의 참 나이기 때문에 공사상과 상충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공한 가운 데 꽉 차 있는 공사상 그 자체이다.
<능엄경>의 서두에서 파사익왕은 나지 않고 죽지 않는 길이 무엇이냐를 물었다. 파사익왕의 질문에 대한 답은 온 우주에 꽉 차 있는 참성품, 항상 내 것인 참성품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능엄경>에서 부처님이 답변하는 특이한 점은 인연법이 니, 무자성이니, 공사상이니, 이런 것들을 들먹이지 않고 변하 지 않는 참마음을 일관성 있게 내세우면서 결과적으로 인연법과 무자성법. 공사상을 다 드러내 보였다. 눈이나 귀나 코 등의 감각기관과 그 감각기관의 대상인 형색이 나 소리 등에 속지 않고 그것들을 오히려 지배할 때 참마음이 나 타난다고 한다. 긴 끝에 달린 추의 움직임을 따라 눈동자가 움직 일 때 눈동자도 따라 움직일 수 있다. 이때에 보는 성품까지도 움직이면 참마음을 등지고 감각기관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보는 성품이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그 성품에 의해 살 때 참마 음을 찾는 것이 된다. 실에 달린 추에 끄달리지 않기는 쉽다. 그러나 재물과 명예와 색에 끄달리지 않기는 참으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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