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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7-03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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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공부방] 불교 기초 교리<제1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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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9,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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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에 대하여
우리가 공덕을 지을 수 있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라! 착한 행위를 하고서도 어찌 그 행위에 대하여 아무런 마음도 일으키지 않을 수가 있으며 또 그러한 행위를 받은 상대에게도 아무런 마음을 일으키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억울함을 당하였어도 어떻게 원망과 분노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또 행복을 부처님이 주신 단약이라 하며 집착하지 않고, 불행을 부처님이 주신 쓴 약이라 하며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수행을 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수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세가지로 분류되어진다. 수학(修學)과 수도(修道)와 수행(修行)이다.
어떤 이가 부산을 가야 하는데 가는 방법을 모르며 또한 어디 마땅히 알고 있는 사람도 없다고 가정하여보자. 그렇다면 그 사람은 우선 지도를 가지고 부산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지도를 보는 법을 모른다고 가정하여 보자. 그렇다면 이 사람은 지도를 보는 법을 우선 배워야 한다. 그리고 지도를 보면서 부산으로 가는 길을 찾으며 또 자동차를 분비하여야 한다. 그리고 나서 운전을 하여 부산으로 가야 부산에 도착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가 되려는 이는 부산을 가려는 이가 지도를 보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우선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가를 배워야 한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학문을 닦는다 하여 수학(修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법을 배웠으면 부산을 가려는 이가 지도를 보면서 부산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자동차를 준비 하듯이 그것을 실천하면서 부처가 되는 길을 확실하게 찾아야 한다. 이것을 부처가 되는 길을 닦는다 하여 수도(修道)라고 한다. 이 수도가 다 끝났으면 길이 통하였다 하여 도통(道通)하였다 한다. 그리고 나면 실지로 그 길을 따라 자동차를 타고 부산까지 가야 하듯이 수도를 통하여 안 실천을 통하여 부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행을 닦는다 하여 수행(修行)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려면 삼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하는데 불교의 삼매에 대하여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하여 불교의 삼매와 요가의 삼매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하여 보겠다.
우리에게는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가 있다. 본능적인 자아는 인간으로써 가지고 있는 번뇌에 이끌리는 자아이며 지성적인 자아는 교육이나 종교를 통하여 번뇌에 의하여 이끌리는 본능적인 자아를 제어하여 억제하여야 할 것은 억제하고 권장하여야 할 것은 권장하는 역할을 하는 자아이다.
요가에 있어서의 삼매는 지성적인 자아를 최고의 단계(자와 타가 초월되어 자아에 대한 인식이 없는 단계)로 끌어 올린 후 그것이 본능적인 자아를 완전하게 억제함으로써 본능적인 자아를 소멸시켜 지성적인 자아만을 가지게 한 후 궁극적으로는 그것 조차도 초월하여 버리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지성적인 자아를 업그레이드시킬지언정 그것을 가지고 본능적인 자아를 완전하게 제어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 갈등 그 자체를 근본번뇌에 의하여 발생되어지는 번뇌로 인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 있어서의 삼매는 자아이면서도 자아를 초월한 그리고 본능적인 자아도 아니고 지성적인 자아도 아닌 그러한 자아가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객관적으로 관(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번뇌를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어째서 번뇌를 소멸시킬 수 있는가를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미국의 한 정신과 병원에서 술을 마시고 추태를 부리는 사람을 치유하는 임상 사례인데 술에 취하여 항상 주정을 부리는 이는 술이 깨면 자기 자신이 부린 추태에 대하여 후회하고 반성하면서도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곤 한다. 이러한 사람에게 그 사람이 술에 취해서 하는 행동을 비디오로 촬영하여 그 다음날 보여주면 추태를 부리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가 쳐다보면서 그 다음부터는 술에 취해도 똑 같은 추태를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교의 삼매에 있어서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와의 갈등을 자아가 초월되어진 자아가 관함으로써 똑 같은 갈등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이것은 그것에 대한 번뇌가 사라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 똑 같은 갈등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은 지혜가 발생해서 인데 이것을 불교에서는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바라밀이란 의식되어지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반야란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반야바라밀이란 자기자신에게는 의식되어지지 않은 상태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에게는 지혜인지 무엇인지 조차도 인식되어지지 않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에 맞추어 수학과 수도와 수행을 설명하여 보면 수학은 우선 왜 성불하여야 하는가를 알고 그 방법을 알기 위하여 삼법인 12연기 사성제 팔정도 나아가 37보리분법 등을 공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도란 여러 수행방법을 통하여 삼매에 들어가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는 기능을 가진 자아를 초월한 자아를 형성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가 형성되어져서 그 자아가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을 때 불교에서는 삼매에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삼매는 끊어지는 법이 없이 죽을 때까지 지속되어지는 삼매이며 여기에서 반야바라밀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은 이 반야바라밀에 의하여 일상생활 그 자체가 수행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수행이라 할 때는 수도의 과정이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것이기에 수행이 바로 수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반야경]을 읽어보면 제불 보살은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성불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도 반야용선을 타고 고해의 바다를 건넌다고 하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수행을 분류하면 수학과 수도와 수행으로 분류가 되는데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수도이다. 이 수도란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와의 갈등을 끊임없이 관할 수 있는 자아를 초월한 자아를 형성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자아를 형성시키는데 있어서 방해요인이 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들에게 삶, 건강, 젊음, 부귀영화 등의 즐거움에 집착하게 만드는 요인인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고,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의 번뇌이다.
첫 번째 요인을 없애기 위해서 불교에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는 출가(出家)를 요구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요구하는 출가는 가출과는 다르다. 가출이란 이러한 환경을 스스로 회피하는 것이지만, 출가란 이러한 환경을 극복하려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출가를 번뇌화택에서 나오는 것이라 하여 가정을 버리고 홀로 되는 것 보다도 마음의 출가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을 없애기 위해서는 계율을 지켜야 한다. 계율(戒律)이란 계(戒)와 율(律)을 말하는데 계란 자신과 부처님과의 약속을 말하며 율이란 불교의 승단 즉 단체가 원활하게 운영되게 하기 위한 단체의 규정이 그것이다. 그런데 불교계에서는 이 계와 율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고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사용되는 계 중에는 계라고 하기보다는 율에 가까운 것도 많이 있다. 그래서 흔히 계와 율을 구분하지 않고 계율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것은 반드시 언젠가는 시정되어져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계에는 대승불교에서는 승려에게는 보살계가 있으며 신도에게는 십중대계가 있고 소승불교에서는 승려에게는 비구, 비구니, 식차마니, 사미, 사미니계가 있으며 신도에게는 5계가 있다. 이러한 계들은 계라고 할 수 없는 율에 가까운 것도 많이 있어 일반적으로는 계율이라고 부르지만 편의상 계라고 하여두자. 그런데 독자들은 부처님과 자신의 약속은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대로 하면 되지 이렇게 정해 놓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계는 승려로써 또는 불교신도로써 이러한 정도는 최소한 부처님과 약속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취지에서 모델로 정해 놓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정해져 있는 계를 받았다 하여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과 자신과의 약속을 정하는 의식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자신이 따로 약속을 정하고 그것을 지킨다면 그것이 계를 지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를 어겼다고 하여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신행생활에 오점을 남기게 된다. 그렇기에 계를 지키지 못했음을 참회하는 포살법회와 자자법회가 있는 것이다.
율이란 단체가 운영을 원활이 하기 위하여 정해놓은 규범이기에 종단으로 본다는 종헌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법률 또는 규칙이나 시행령 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어겼다고 하여서 반드시 신행생활이 잘 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단체를 운영함에 고충이 따르는 관계로 강제성을 가진다. 그리고 처벌하기 위하여 대중공사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수학을 하여 불교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들을 습득한 후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는 자아를 초월한 자아를 만들기 위하여(삼매를 체득하여 반야바라밀을 얻기 위하여) 수도에 들어가게 된다.
수도하는 방법을 크게 나누면 네 가지가 된다. 참선(參禪). 간경(看經). 주력(呪力). 염불(念佛)이 그것이다.
참선이란 요가 수행법 중 명상법을 도입시켜 완성된 방법으로 세 가지가 있는데 위빠사나선과 간화선(看話禪)과 묵조선(默照禪)이 그것이다. 위빠사나선은 소승불교국가인 동남아지역에서 행하여지는 참선법인 관계로 그 쪽 지역에서 완성된 것 같고 간화선이나 묵조선은 중국에 와서 완성되었다.
위빠사나에 있어서는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는 자아를 초월한 자아를 형성시키기 위하여 조식법(調息法)이 사용되어진다. 다시 말해서 요가의 명상법처럼 숨쉬기를 통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그 후에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는 것이다.
그리고 간화선이란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는 자아를 초월한 자아를 형성시키기 위하여 화두(話頭)라는 것을 사용한다. 화두란 말 그대로 말머리인데 우리가 말을 시작할 때 처음으로 꺼내는 말을 말머라고 하지만 여기서의 의미는 정신을 통일시키는 게기가 된다는 의미에서 말머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두란 의심덩어리를 말하는데 이를테면 어떤 이가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그러자 조주선사는 말씀하셨다. "없어"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부처님의 경전인 「열반경(涅槃經)」을 보면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 개에게도 불성이 있을 터인데 왜 조주선사는 없다고 하였을까? 하여 무(無)를 가지고 참구한다는 무자화두는 이미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화두이다. 또 요즘 스님들이 잘 사용하는 "이 뭣고" 화두는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경상도의 사투리로서 밥 먹고, 생각하고, 돌아다니며 생로병사를 거듭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라고 참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화두는 의심덩어리이다. 그런데 이것은 머리로 분별하여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을 동일하게 하는 수단으로써 사용하는 것이다. 의심덩어리로 정신이 통일되면 화두는 자아를 초월한 자아가 되어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를 관하게 된다. 이것을 선가에서는 자나 깨나 일상생활에서도 화두를 놓으면 안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내가 화두를 참구해서는 안되고, 화두에 의하여 내가 참구되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묵조선이란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는 자아를 초월한 자아를 형성시키기 위한 전단계로서 위빠사나나 간화선처럼 조식법이나 화두를 사용하지 않고 처음부터 무작정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그러한 자아가 형성되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도과정을 거치면서 자아를 초월한 자아가 형성되어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게 되는 횟수가 많아지다가 그러한 자아가 없어지지 않고 항상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24시간 365일 지속되면 일상생활 모든 것이 삼매가 되는 것이기에 반야바라밀이 항상한다. 그렇게 되면 잠을 자는 것은 와선이 되고 걷는 것은 행선이 되며 앉아 있는 것은 좌선이된다. 그래서 항상 선을 하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상태가 수행의 마직막 단계인 수행을 하고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간경이란,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을 부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하여 연구하고 실천함으로써 경전에 있는 부처님의 말씀 그 자체가 자아를 초월한 자아가 되어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경전을 읽지 않아도 경전과 항상 함께하게 되어 24시간 365일 경전과 함께 하게 되며 생활 속에서도 새로운 경전을 발견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반야바라밀이 항상하여 수행의 마지막 단계인 수행에 들어가게 되어 반드시 성불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력이란,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는 자아를 초월한 자아를 형성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과 입을 부처님의 몸과 마음과 입으로 만드는 것으로서 그 방법은 헤아리 수 없을 정도로 많으나 대표적인 것으로서 삼지과밀이 있는데 삼지과밀이란 몸으로는 인드라(부처님의 수인)을 하고 마음으로는 만다라(부처님의 세계)를 생각하며 입으로는 다라니(뜻 풀이는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으나 뜻을 풀이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부처님 나라의 신비스러운 언어라고 하는데 이 중 그 길이가 짧은 것을 흔히 진언이라고 한다)를 외는 것이다. 또 티벳에서 흔히 쓰이는 방법은 입으로는 다라니나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면서 마음으로는 만다라를 생각하면서 몸으로는 만다라를 그리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사경(경전을 옮겨 쓰는 행위)이나 사불(부처님의 모습을 옮겨 그리는 행위)가 있다. 또 일반적으로 기도라는 이름으로 스님과 신도들 사이에서 행하여 지는 몸으로는 뱍팔배나 천팔십배 등을 하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마음을 통일하여 부처님의 모습을 생각하는 방법이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행하여 지는데 이런 것들이 다 주력 수행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거나 진언이나 다라니을 외움으로써 부처님과 하나인 입이 되고 몸으로는 인드라를 하거나 만다라를 그리거나 사경이나 사불 또는 절을 함으로써 몸이 부처님과 하나 되고 마음으로 부처님의 세계인 만다라를 생각하거나 부처님의 모습을 생각함으로써 부처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탄생되어지는 자아를 초월한 자아를 통하여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와의 갈등을 관하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아도 항상 관할 수 있게 되면 항상 반야바라밀이 함께하게 되고 수행에 있어서 수도의 단계가 끝나 수행의 단계로 들어가게 되어 반드시 성불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염불이란, 자신을 구원하시고자 원을 세워 극락세계를 만드시고 그분의 명호를 외우는 이들은 모두가 극락세계에 탄생하게 하시어, 업장을 다 소멸시켜 성불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아미타부처님을 신앙하는 것인데 여기에 있어서는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와의 갈등을 아미타부처님이 항상 관하신다고 믿는 거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아미타부처님의 옆에는 눈이 천 개 손이 천 개인 천수천안의 관세음보살님이 계셔서 내가 볼 수 없는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까지도 다 보고 계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믿기만 한다면 수도라는 단계가 필요없게 되고 바로 반야바라밀이 증득되어서 성불도에 이루게 된다.
이상의 참선, 간경, 주력, 염불 수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이것을 용수보살(龍樹菩薩)은 「십주비파사론(十住毘婆沙論)」이라는 저술의 <이행품(易行品)>에서 성불로 가는 수행의 길을 두 개의 문으로 나누어 난행문(難行門)과 이행문(易行門)을 설명하고 있다. 난행문이란 어떤 목적지까지 가는데 육로를 이용하여 어렵게 걸어 가는 것이고, 이행문이란 뱃길을 통하여 쉽게 가는 것이라고 용수보살은 설명하고 있다.
또 중국의 담란대사(曇鸞大師)는 [무량수우바리사원생게주(無量壽優婆提舍願生偈)]라는 저술에서 자력문(自力門)과 타력문(他力門)으로 나누고 있는데 자력문은 성불도를 향하여 자기 힘으로 가는 방법이며 타력문이란 부처님의 힘을 빌어 가는 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도탁선사(道棹禪師)는 [왕생요집(往生要集)]이라는 저술에서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으로 나누고 성도문은 행하기 어려워 성민만이 가는 곳이고 정토문은 행하기 쉬워 범부들도 가는 곳이라 하고 있다.
여기에서 용수보살이 난행이라 하고 담란대사가 자력이라 하고 도탁선사가 성도문이라 한 것은 참선, 간경, 주력의 수행법을 말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그 힘든 수도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수보살이 이행이라 하고 담란대사가 타력이라 하고 도탁선사가 정토문이라 한 것은 염불수행법을 말한다. 왜냐하면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는 자아를 초월한 자아는 아미타불이기에 아마타불을 믿음으로써 수도의 과정이 끝나는 것이기에 믿음으로 그 어려운 수도의 과정이 끝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을 얻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참선이나 간경이나 주력수행을 통하여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는 자아를 초월한 자아를 형성시킨 다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참선, 간경, 주력의 수행을 믿기는 쉬우나 행하기가 어렵다하여 난행이신(難行易信)이라 한다. 그리고 염불 수행을 행하기는 쉬우나 믿기가 어렵다고 하여 이행난신(易行難信)이라 한다.
그리고 조사스님들은 자력수행법과 타력수행법의 장점과 단점을 보안하기위하여 병행하는 수행을 하였는데 다시 말하면 참선수행을 하면서도 함께 염불수행을 하였고 간경수행을 하면서도 염불수행을 함께 하였고 주력수행을 하면서도 염불수행을 함께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리고 우리나라의 원효성사(元晩聖師)는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라는 저술에서 정토종(淨土宗)은 범부는 물론이요 성인도 함께 성불하는 가르침*이라고 하고 있다. 얼른 이해가 안가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염불이 범부도 할 수 있을 정도로 하기 쉬운 방법이면 성인은 더 하기 쉬운 것일 터이니 *성인은 물론이요 범부도 함께하는 성불의 가르침*이라고 하여야 맞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범부는 자신이 범부임을 자각하는 사람을 말하고 성인은 자신이 성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 성도문을 통과한 자만이 정토문에 다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염불은 수행법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염불은 참선, 간경, 주력 수행을 통하여 수도가 끝난 이들이 가는 길이 염불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참선, 간경, 주력은 수도이고 이러한 수도의 과정을 거친 이들은 걷는 수행의 길이 염불수행인 것이다.
그러나 근기가 수승한 이들은 수도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바로 수행의 길인 염불수행으로 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근기가 수승하다는 것은 자아가 그다지 강하지 않고 부처님을 쉽게 믿을 수 있는 이들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염불 수행은 불교의 근본 신앙인 것이다. 그래서 다음 장 본원염불에서는 염불수행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봄으로써 불교의 근본 신앙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겠다.
출처 http://www.obong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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