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0-01-27 09:58
[사찰문화실] 17) 원찰이란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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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찰(願刹)

  스님들의 수행이나 포교를 목적으로 세워진 사찰이 아닌, 특정한 인물의 명목을 빌거나 창건주 자신의 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을 원찰이라고 한다. 또는 기왕에 창건된 절을 특정 목적의 원찰을 삼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찰에는 주로 특정 인물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진영(眞影)을 봉안하는데, 일명 원당이라고도 부른다. 궁궐 안에도 이와같은 원당을 지어 내불당(內佛堂)이라고 이름하였다.

 내불당의 역사는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전인 소지왕 때 처음 나타나지만, 공식화된 것은 진흥왕 5년(544) 흥륜사가 처음이다. 그러나, 이 때는 특정인물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당이라기 보다는 국가의 발전과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그 후 동해의 용왕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한 문무왕의 넋을 위로하고 그의 수중릉을 돌보기 위해 지은 감은사의 경우도 원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봉덕사 역시 무열왕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지은 원찰이며, 팔공산 동화사 역시 민애왕을 추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원찰이었다. 왕이 아닌 일반인의 원찰로는 순교자 이차돈의 명복을 위해 지은 자추사가 처음이다. 이와같이 신라에는 원찰사상이 팽배해 있어서 원찰을 관리하는 별도의 기구인 원당전(典)을 두기도 하였다.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왕실과 귀족들을 위한 원찰들이 속속 세워졌다. 고려 고종 때 세운 강화도 선원사를 비롯하여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흥천사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조선시대에는 역대의 능원 주변에 집중적으로 원찰을 많이 세웠는데, 조선시대의 원찰은 숭유배불의 영향으로 원찰을 새로 짓기보다는 주변에 있던 사찰을 원찰로 정하는 예가 많았다.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의 원찰 신륵사, 단종의 능인 장릉의 원찰 보덕사 등이 그러한 예이다. 그러다가 차츰 원찰에서 생기는 폐단이 심해져서 조선 정조 원년(1776)에는 법을 정해 원찰제도를 없앴다.

 이러한 원찰제도는 불교의 호국적 역할을 도모하기도 했지만, 부정적인 면으로는 불교가 왕권에 편향 종속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